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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 불교의 뉴리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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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불교전국승가회 공동의장 성관 스님 |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
수원포교당 주지이자 실천불교전국승가회 공동의장인 성관(52) 스님은 한국 불교의 뉴 리더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가장 먼저 거론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스님이 불교계의 뉴 리더로 떠오른 가장 큰 이유는 그가 3대 도심 포교당 중의 하나로 꼽히는 수원포교당을 번창시켰기 때문이리라. 실천불교승가회 의장으로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 등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중앙종회 의원, 문화부장, 호법부장, 총무부장 등의 요직을 두루 지낸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스님을 만났을 때 이런 업적이나 직책보다 인상적인 것은 바르게 알고, 시대와 더불어 호흡하는 불교를 향한 스님의 비전이었다. 요컨대 스님은 새로운 불교를 향한 비전을 열정적으로 실천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불교계 주요 인물로 부상했던 것이다. 진작부터 거론되었으면서도, 이제야 스님을 만난 것은 그가 최근 학교 겸 구호시설 건립 일로 캄보디아를 다녀온 때문이다. 해외 출장에서 돌아온 스님을 지난 19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수원포교당에서 만났다. 화성 안 저잣거리를 지나다 갑자기 마주한 수원포교당, 크지 않은 경내에 들어서자 마당의 아름드리 고목들이 바깥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저잣거리 옆의 도심 포교당이었지만 일주문을 지나는 순간 이미 사바세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저리도 번듯한 포교당이지만 20년 전 스님이 이곳에 부임할 때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실은 부임이랄 것도 없었다. 밤중에 도착한 스님에게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없어 담을 넘어 들어가야 했다. 당시 미국 포교의 꿈에 부풀어 있던 그는 용주사에 주석하던 정대 전 총무원장이 강권한 포교당 주지직을 “몇 달만 하겠다”며 수락한 뒤 이 절에 도착했던 1986년 9월 28일의 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절은 예상보다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첫 법회를 해보니 모여든 사람이 겨우 100명 정도, 도심 사찰치고는 기대 이하였지요. 신도 수보다 더 문제는 전반적인 절의 관리 상태였습니다. 관리는 고사하고 어느 날은 법당에 있어야 할 불전함이 뜯긴 채 법당 뒤에 나뒹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겐 자신이 있었다. 이미 몇몇 절에서 포교하며 의미있는 성공을 경험한 터였다. 무엇보다 그는 성실하면서 부지런했고, 아이디어가 많았다.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하늘에도 닿을 수 있겠다 싶었다. 스님의 출가 당시 초심도 ‘깨쳐서 부처가 되겠다’는 것 못지않게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며 뭇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겠다’는 것이었다. 황폐한 포교당에 앉아 출가 당시를 생각했다. 고교 2년 때였다. “학교에 다녀와 창밖을 내다보는데, 늙으신 부모님이 리어카를 끌고 밀며 들에서 돌아오시더군요. 노부모 봉양하며 자식들 기르느라 어느새 늙어버리신 부모님, 눈물이 왈칵 솟았습니다.” 한때는 나 못지않은 청춘이었을 부모님, 오직 가족이 배곯지 않게 허덕이다 보니, 저렇게 허리가 휘어 버리셨구나. 자신의 꿈은 어디로 간지 알지도 못한 채.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가족을 부양하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대장부의 꿈을 펼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출가. 그가 이 생각에서 출가를 감행까지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출가 후 그의 상황은 생각과 다르게 전개된다. 당시 인천 용화사에 살던 스승 정공스님이 갓 출가한 그를 데리고, 전북 무주 깊은 산골의 외딴 절 원통사로 들어간 것이다. 강원이나 선방에 가 봐야 못된 것만 배우게 된다는 게 이유였다. 쓰러져 가는 슬레이트 법당 하나가 전부인 절, 여기서 그가 한 것은 뜻밖에도 중노동이었다. 60이 가까운 스승과 둘이서 매일 땅 파고, 흙벽돌 찍고, 서까래 져 나르고, 기둥 깎아 절 짓는 게 일이었다. 깊은 산중에서 지게 지고 낫질, 톱질, 망치질하기 2년여, 그는 다시 도망치듯 스승의 곁을 떠난다. 피 끓는 젊음과 찬란한 꿈을 안은 채 출가한 그로서는 사람과 어울리며 공부하는 대신, 외딴 산골에서 중노동으로 불성을 깨닫는다는 생활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 스승에게 배운 부지런함과 성실함은 향후 그의 삶 전반을 돕는 큰 힘이 된다. 수원 포교당으로 오기 전 자력으로 동국대 승가학과에 진학해 공부하고, 안양의 작은 절 진덕사, 용주사, 하와이 불은사 등지의 포교에서 발군의 역량을 발휘하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수원 포교당에 온 스님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교육이었다. 곧바로 금강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처음 주지실에서 5, 6명을 모아 시작한 강의는 머지않아 30~40명으로 불어났다. 좁은 방에서는 더 이상의 교육이 불가능해 법당 뒤에 조립식 가건물을 짓고 교육을 본격화했다. 1988년에는 20주 과정의 기초 교리강좌를 개설했다. 절 앞에 플래카드만 내걸어도 수강생이 몰려들었다. 지금까지 30기가 졸업한 이 강좌 수료생은 교수, 의사, 변호사에서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6000여명이 넘는다. 다음으로 눈을 돌린 것은 신도조직이었다. 당시만 해도 신도는 나이 든 여성들이 주축이었다. 스님은 부임 이듬해인 1987년 남성 신도들의 조직인 ‘거사회’를 창립, 절의 분위기를 일신한다. 기초교리 강좌를 수강한 이들로 봉사단체인 ‘반야회’를 만들었고, 청년들로는 신행청년회를 창립했다. 교육과 조직이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자 문화포교도 본격화했다. 부임 얼마 후 불교전문지를 발행하며 서점을 열었던 스님은 역량이 축적되자 아예 연건평 1000평 규모의 초현대식 불교문화원을 건축했다. 이 문화원에서 그는 대금과 단소, 살풀이 무용이 어우러지는 공연을 펼치는가 하면 나혜석추모음악회, 국악관현악단 연주 등 다양한 공연을 기획, 포교당을 지역문화의 중심지로도 재탄생시켰다. 스님의 포교에서 눈에 보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신도 수보다 중요한 건 ‘바르게 아는 불자’였고,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하는 불자’였다. 스님은 “이 시대를 살며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큰일이 있을 때 이를 외면하면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니다”고 강조한다. 스님이 사회민주화와 민족통일, 그리고 불교계 내부의 개혁을 위해 노력해온 실천불교승가회의 핵심 구성원이자 의장으로서 활동한 것도 이 때문이다. 티베트 불교 지도자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달라이 라마 방한 추진위 집행위원장이며 불교인권센터 대표를 맡아 동분서주하고, 캄보디아에 학교와 보육원을 설립하기 위해 진력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실천불교승가회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실천불교승가회는 한국 불교가 그 거센 민주화 바람에도 나 몰라라 하고 있을 때 민주화에 노력한 유일한 승려단체였습니다. 1994년 종단 개혁을 비롯해 종단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원칙에 입각해 바른 목소리를 내 온 것도 이 단체입니다. 그 뒤 총무원장 선거 등 종단 내부의 크고 작은 일에 참여한 것도 실천불교의 원칙을 관철하는 한 방편이었지요.” 캄보디아의 학교 건립도 국내외의 다양한 현안으로 활동폭을 넓힌 실천불교승가회의 의장 자격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캄보디아 학교 건립은 실천불교승가회의 일이라기보다 스님 개인의 원력이 더욱 커 보인다. “10년 전, 앙코르와트 지역을 처음 여행하며 그 장엄함과 웅장함에 압도됐습니다. 초라하기만 했던 아시아 민족이 이런 거대한 유적을 남기다니, 그간의 서양 콤플렉스가 일시에 사라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찬란한 문화를 가진 민족의 후손들이 길을 가로막고 ‘원 달러’를 외치는 것을 보니 온갖 생각이 다 들더군요.” 이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들을 돕는 방법을 찾던 스님은 두어 해 전 마침내 교육 및 구호시설 건립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들을 도우면서 떠오른 서구 문화 제국주의의 아픈 기억들. 스님은 다짐했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조금 넉넉하다고 해서 그곳에서 결코 한국 불교를 포함한 우리 문화를 가르치려 들지는 않으리라. 내가 할 일은 이 아이들이 자라 캄보디아의 종교와 문화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앙코르와트를 이룩한 저력을 되찾게 하는 일이다…. 출가한 지 30여년, 포교당 주지로 일한 지 20년. 불교계 안팎을 가리지 않고 온갖 일을 하며 먼 길을 달려왔지만 아직도 스님에겐 갈 길이 멀다. 포교당에서는 청소년·성인 신도와 출가 승려를 교육하고 노후수행시설 건립 등 복지시설도 확충해야 하며 신도들의 장례를 거두어주는 일에 이르기까지 할 일이 숱하게 남아있다. 특히 21세기 새로운 불교를 향한 비전을 지닌 스님답게 인재양성과 관련한 계획은 새롭고도 원대하다. 이를테면 스님이라고 해서 불교만 공부할 것이 아니라, 외국어와 동·서양사, 인문사회학 등을 함께 공부하며 시대를 통찰할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포부가 큰 만큼이나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이 길이 아득해 보일 때마다 스님은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60명의 비구를 떠나보내며 설하신 ‘전도선언’을 떠올린다. “비구들이여, 이제 너희는 신들과 인간들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러니 길을 떠나라. 사랑하는 형제들이 사는 곳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자비를 베풀기 위해. 비구들이여, 만나는 사람마다 성스러운 가르침을 이야기하며 청정한 수행자의 생활을 보여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이치에 맞고 다듬어진 말로 가르침을 전하라.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전도선언’의 이곳저곳을 설명하며 드러낸 ‘중생구제’라는 거대한 포부. 일개 출가자가 말하기에 지나치게 크다고 여겼음인가. 잠시 침묵하던 스님은 자신의 포부를 고쳐 말했다. 나를 통해 단 한 사람만이라도 부처님의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면, 출가한 의미는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약력 ▲동국대 졸업. 동국대 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 동국대 대학원 교육학 박사과정 수료 ▲미국 하와이 불은사에서 포교 ▲수원포교당 주지(현)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조계종 총무원 문화사회부장, 문화부장, 호법부장, 총무부장 ▲달라이 라마 방한준비위원회 집행위원장 ▲실천불교전국승가회 공동의장 ▲불교인권센터 대표 ▲경찰대 경승 및 불교학생회 지도법사 | ||||||||||
기사 게재 일자 2006/06/23 |
출처 : 학타고 청산에 들어(마음산방)
글쓴이 : 마음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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