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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 불교의 뉴리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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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 석왕사 주지 영담 스님 |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
영담(53) 스님은 불교 조계종 종단 정치의 핵심 인물이다. 1994년 조계종 개혁에 앞장선 뒤 월주 - 고산 - 정배 총무원장으로 이어지는 종단에서 요직을 맡으며 막전 막후 실세로 활동했다. 이후 법장 - 지관 스님의 총무원장 당선으로 야인으로 물러났으나 조계종의 2대 권력 중 하나인 동국대 이사회에서는 여전히 다수파를 점한 채 현 집행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이렇게 두드러진 스님의 정치활동으로 흔히 가볍게 여겨지는 것이 있다. 그가 국내 최초의 대규모 도심 사찰이라고 할 경기 부천시 원미구 원미동 석왕사의 주지라는 점이다. 1976년 은사인 고산 스님이 천막법회로 시작한 석왕사 창립에 함께 참여했던 그는 1982년 약관 29세에 주지로 취임, ‘바른 불교, 실천 불교’를 기치로 내걸고 20여년만에 등록신자 5만명을 헤아리는 대형 사찰로 키웠다. 취임 직후 ‘석왕사보’를 발행, 사실상 현대불교 최초의 문서 포교를 전개했던 그는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중심으로 한 어린이 포교, 생활협동조합 설립 운영, 부천시민신문 발행, 부천외국인 노동자의 집 설립 운영 등의 활동을 통해 불교의 지역사회 운동 및 사회민주화 운동에 신기원을 이룩했다. 특히 1980년대 석왕사는 민주화 및 노동운동가의 단골 집회소로, 부천의 민주화 성지로 알려지기도 했다. 스님과의 인터뷰를 위해 지난 13일 오후 찾은 석왕사는 일주문과 법당, 팔각구층탑, 범종각 등이 사찰이라는 것을 말해줄 뿐 여느 사찰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생활협동조합, 아름다운가게, 무료진료소, 룸비니 수영장, 어린이집, 유치원, 왕생극락전(장례식장), 안락정토(납골당)…. 생협과 아름다운가게에 물품을 실은 트럭이 오가는가 하면 때마침 진행중인 법당 보수공사로 거친 기계음이 수시로 들렸다. 저 아래쪽 어린이집에서는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재잘대는가 하면 장례식장과 명부전에는 검은 상복 차림의 유족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서성거리기도 했다. “언젠가 이곳을 찾았던 어느 작가가 이렇게 썼더군요. ‘막 일어서는 중소 기업의 생산 현장 같은 사찰’이라고. 석왕사에서 운영하는 여러 시설이 몰려 있는데다 이 시설 종사자들과 찾아온 사람들, 신도들이 뒤섞여 부산하게 움직이다 보니 그럴 겁니다. 더욱이 이런 시설들이 체계적인 계획으로 들어선 게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순서 없이 들어서다 보니 어수선한 느낌은 더하겠지요.”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어린이집, 유치원이 장례식장, 납골당과 한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 이를 두고 스님은 ‘문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책임지려는 것’이라며 웃었지만 이른바 혐오시설에 대한 불편함은 가시지 않았다. 처음 들른 방문객의 심정이 이 정도인데 주말마다 이곳을 드나드는 신도들은 반발하지 않았을까. “더러 반대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봐라. 나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영안실과 빈소와 납골당이 있는 방에서, 매일 유족들의 통곡을 들으며 먹고 잠 잔다. 언젠가 여러분도 죽어 장례를 치르고, 납골당에 안치돼야 하지 않느냐….” 그랬다. 아이는 좋아하면서도 병듦과 늙음과 죽음은 기를 쓰고 피하려 드는 현대인, 집에서 자연스럽게 맞이하던 생로병사 모두가 병원으로, 영안실로 내몰린 시대다. 그러나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피한다는 건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것, 절이야말로 제대로 살고 죽는 것을 생각하고 공부하는 곳 아닌가. 결과적으로 이렇게 어수선한 모양새가 됐지만, 알고 보니 절에 들어선 시설물 하나하나에는 모두 스님의 원력이 배어 있었다. 수도권 절에서는 최초인 유치원과 어린이집부터가 그랬다. 석왕사 설립 직후 스님이 치중한 것은 어린이 포교였단다. 아이들을 불러모아 무료로 한자를 가르치고, 놀아주는 것이 포교의 전부일 정도였다. 노인을 모셔 여러 행사를 벌이는 것으로 그 아들이나 며느리를 불러들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아이를 불러들이면 그 엄마, 아빠가 틀림없이 오게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맞아떨어졌다. 설립 초에만 해도 아이들만 복작거리던 절이 이젠 수도권 일원에서 손꼽히는 대형 사찰로 성장한 것이다. 어린이 포교에 무게 중심을 둔 사찰에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설립하는 것은 너무 당연했단다. 생협도 이와 다르지 않다. “땅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고, 농민을 살리는 것에 더해 수요자인 도시인에게는 깨끗한 먹을거리를 공급하는 것이 생협입니다. 이건 부처님의 가르침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절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지요.” 집에서 쓰지 않는 것들을 받아 저렴하게 공급하고, 수익금을 어려운 이웃돕기에 쓰는 아름다운가게도 그렇고, 장애인센터나 사회복지기관 운영도 마찬가지였다. 부천 일대에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거주하니 이들의 권익을 보호해주는 외국인 노동자의 집이 필요했다. 요컨대 이런저런 복지시설은 부천시 원미동이라는 지역사회의 특성상 포교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는 이야기다. 스님은 심지어 1980년대 석왕사가 인천과 부천 일대 민주화 운동가와 노동자가 집결하는 곳으로 알려지고, 스님이 불교 민주화 운동권 1세대로 분류된 것조차도 포교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원미동 사람’들이란 소설도 나왔지만, 당시 이곳엔 변두리로 내몰린 가난한 이들과 노동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 했습니다. 이들이 각종 행사를 해야 하는데 장소가 없잖아요. 그래서 장소를 제공했지요. 못 배운 게 한이 된 사람들을 보고 야학을 열었고, 문화를 향유할 기회가 없으니까 각종 문화행사를 벌이고….” 그렇다면 그가 옥천신문, 남해신문, 해남신문, 홍성신문 등과 함께 유력 지역신문으로 알려진 부천시민신문의 발행인으로 활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1990년대 초반, 지방자치가 시작됐지만 지역의 현안을 다룰 언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원혜영, 김문수, 이미경, 양귀자씨 등 운동가, 지식인, 종교인들이 참여해 제대로 된 지역신문 하나 만들자며 나선 결과가 부천시민신문입니다. 물론 석왕사도 여기에 참여했는데, 아마 절이 서울 강남에 있었다면 전혀 다른 활동을 했을 겁니다. ” 스님은 당시 사회민주화 운동에서 자신의 역할이 대부분 포교를 위한 것이었다고 물러서지만, 여기에는 새겨 들어야 할 부분이 많다. 어린이 포교야 그렇다 치더라도 생협이나 야학,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활동에 더해 지역신문 발행에까지 참여하는 것이 시대정신에 대한 나름의 통찰 없이 가능하지 않은 탓이다. 이렇게 보면 그가 1994년 종단 개혁의 최전선에 나선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사회에 몰아친 민주화 바람에도 요지부동이던 종단을 일신하기 위해 개혁에 나섰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처음에는 순수해 보이던 개혁 주도 세력들이 훗날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치열한 종권 다툼으로 초심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스님은 목소리를 높인다. “불교 개혁을 한 이유가 뭡니까. 종단의 민주화, 즉 총무원을 견제하고 독주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그 결과 종단은 민주화됐고, 개혁 종단도 반대파의 적잖은 견제를 받았지요. 어느 시기에는 아예 선거에 져서 반대파에 총무원을 넘기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야당이 된 지금, 종단의 각종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종권 다툼이라고 비하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견제를 내가 나서서 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목표는 종권을 장악하는 것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효과적으로 전법하고, 수행하고, 교육하면서 투명한 행정을 펼치는 건강한 종단을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첨단정보화 시대에는 거기에 걸맞은 종단의 비전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스님은 동국대 이사회에서의 갈등도 같은 맥락이라고 강조한다. 자신의 모교이기도 한 동국대에 집착하는 이유는,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동국대, 한때 3대 사학의 하나였던 동국대의 그 위상을 되찾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다. 그래도 의문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불문에 들어와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것은 수행자가 되려는 것. 아무리 절 살림을 돌보는 게 소임인 사판승이라지만, 작금의 다툼은 심한 게 아닌가, 스님으로서 너무 번잡하게 살지 않는가. 그도 이 점에는 동의한다. “새벽 3시가 되기 전에 일어나 밤 늦게까지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 동안 벌인 일이 너무 많고 바빠 차분히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부족하지요. 언젠가 이 일들을 마무리하면 산중 선방에 들어가 원없이 수행을 했으면 하는 게 꿈입니다.” 수행이 본분인 스님의 신분이면서, 선방 수행이 꿈인 이 아이러니라니, 그 꿈을 이루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삶에 만족할까. “선친이 세상을 떠나고 기댈 것이라고는 없던 13세 때 절에 들어온 뒤 40년이 흘렀습니다. 행자 시절 새벽 예불을 앞두고 화장실 벽에 기대어 잠시 졸다 예불을 놓치고 꾸중 듣던 일, 공양주를 하며 라면을 끓일 줄 몰라 풀죽을 쑤었던 일, 노스님이 열반했을 때 다비한 뼈를 갈아 까마귀밥이라며 찰밥에 비벼 산에다 뿌리던 것을 보던 심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합니다.” 스님은 요즘 들어 부쩍 ‘물위걸용지인(勿爲乞容之人)하고 능위서타지인(能爲恕他之人)하라, 즉 남에게 용서를 구걸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 스승의 가르침을 생각한다고 했다. 석왕사에서의 포교는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조계종의 교육과 전법, 수행에도 적잖은 변화를 몰고 왔다. 하지만 나는 진정, 남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는가. 스님은 천천히 말했다. “…만족합니다. 다시 태어나도 스님이 되고 싶습니다.”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 약력 ] ▲범어사에서 고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석암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 받음 ▲범어사 강원 수료, 동국대 승가학과·방송대 행정학과·동국대 행정대학원 졸업, 동국대 대학원 행정학과 박사과정 수료 ▲석왕사 주지(현재) ▲부천시민신문 발행인 ▲조계종 개혁회의 상임위원 ▲조계종 중앙종회의원(현재) ▲불교방송 이사장 직무대행, 불교신문사 사장 ▲동국대 이사 |
기사 게재 일자 2006/06/16 |
출처 : 학타고 청산에 들어(마음산방)
글쓴이 : 마음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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