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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 불교의 뉴리더> |
조계사 주지 원담 스님 |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
#1.놓아버림, 떠남…. 조계사 주지 원담(46)스님을 인터뷰하면서 떠오른 것은 뜻밖에도 운수납자(雲水衲子)의 이미지였다. 한국 불교의 상징이자 총본산, 더러 여의도를 방불케 하는 정치와 협상이 이뤄지는 도심 절집의 주지 스님에게서 물처럼 구름처럼 떠도는 수행승을 떠올리다니, 말이 되는가. 더욱이 2년 전 주지 소임을 맡은 그는 이른바 ‘능력있는 스님’의 면모를 보여왔다. 한국 불교 1번지에 걸맞은 가람을 외치며 벌여온 크고 작은 불사부터가 그렇다. 취임 얼마 뒤 일주문 건립을 밀어붙였고, 몇년이나 끌던 대웅전 보수공사를 가볍게 완료했다. 극락전과 종각 해체 복원, 만불보전·문화사업관 건축, 대웅전 삼존불 조성 등의 불사를 추진했고, 15% 나눔운동, 소장스님 기획법회, 연구소 발족, 문화포교 등 굵직한 사업계획을 발표하고 실천했다. 신도들에게는 도심 불교의 모델이 될 만한 수행·신행·교육 공간을 마련하는 한편 경복궁~조계사~인사동을 잇는 문화벨트를 형성해 국내외 관광객들과 시민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한국불교의 얼굴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을 벌여온 스님에게 어울리게 지난 6일 조계사에서 만난 스님의 첫 인상 또한 수행을 업으로 하는 선객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러나 스님과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점차 확연히 다가드는 또 다른 느낌. 무릇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겉모습만으로 가볍게 판단해선 안 된다는 경구는 백번 옳은 말이었다. #2. 중·고교 시절의 그는 문학청년이었다고 한다. 중학교 때부터 신춘문예에 응모했단다. 그러던 중 고교 2학년 때, 그는 여자친구에게서 선물받은‘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고 충격을 받는다. 만법(萬法)이 모두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거늘, 어찌 자기의 마음 가운데서 진여(眞如)의 성품을 단박에 보지 못하는가.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면 모두 부처님 도를 성취하는 것이니, 활연히 깨쳐서 본래 마음을 도로 찾으니라.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사람이 처한 상황, 즉 마음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잖아요. 중요한 것은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에 대해 고심했으나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았어요. 몇 권의 불교서적을 읽어도, 사람들에게 물어도 시원한 답은 없었습니다.” 한때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은 것으로 여겨지던 문학조차 이런 질문 앞에서는 초라하기만 했다. 육조단경에 실마리가 없진 않았다. 저마다 스스로 마음을 관찰하여 자기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깨닫게 하되, 만약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이는 모름지기 큰 선지식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 성품을 볼지니라…. 요컨대 출가해 선지식에게 배우고 깨치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이미 학교에서 기인으로 알려질 정도로, 새로운 걸 찾아 몸을 던지던 그에게 출가는 어려운 결심이 아니었다. 약간의 곡절 끝에 찾은 법주사, 그를 둘러싼 스님들에게 “깨쳐서 부처가 되려고 한다”고 했더니 모두 웃었다. “처음 앉아보는 거대한 자연의 품, 스님들이 웃어도 나는 우습지 않았습니다. 곧 깨쳐서 부처가 될 것 같았거든요. 행자생활을 마친 뒤 강원에서 경전을 배우는데, 마음이 급해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경전이나 들출 게 아니라 화두를 참구해서 깨쳐야 하잖아요.” 결국 그는 이듬해 정월, 강원이 잠시 쉬는 때를 틈타 송광사 선원에 방부를 들인다. 당대의 선지식인 경봉스님을 찾아 화두도 하나 받은 터였다. 드디어 하안거, 선방에 앉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성성적적(惺惺寂寂·깨어 있으면서도 산란하지 않음), 처음 선방에 앉은 이 답지않게 화두도 잘 잡혔다. 이렇게 첫 안거를 끝낸 스님은 내친 김에 송광사 뒤 조계산 정상의 토굴에서 해제철을 보내겠다고 결심한다. 공부자리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토굴생활을 하면 위험하다는 선배들의 걱정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토굴에서 혼자 수행하는데, 이게 생각대로 안 되는 겁니다. 머릿속에 웬 잡념은 그리 떠오르며, 졸음은 왜 또 그리 쏟아지는지. 여수 순천 쪽에서 올라온 바람은 조계산 정상의 그 너른 갈대밭을 솨아하며 지나는데, 나는 그 갈대밭 속 토굴에서 한없이 졸기만 했습니다.” 사람이 그리 그리울 줄도 몰랐다. 기다리는 사람이라야 어쩌다 올라오는 약초꾼, 앉거나 서거나 깨어있거나 잠자거나를 가릴 것 없이 화두를 챙겨야 할 스님이 아침부터 오매불망 그 약초꾼만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도량석을 하기 위해 방을 나서다 마루의 뱀을 밟고 깜짝 놀란 스님은 이를 핑계로 그만 산을 내려오고 만다. 토굴생활 50일 만이었다. 이런 저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선방 출입을 계속하던 그는 20대 초중반, 범어사 원효암에서 지유 스님을 만나 제대로 된 수행을 지도받는다. 하루 한 끼만 먹으며 눕지 않고, 기대지 않은 채 화두만 챙기는 장좌불와(長坐不臥)와 일종식(一種食)을 시작한 것이다. 함께 하던 도반은 피똥을 싸고 중도포기할 만큼 치열한 수행이었다. #3. 3년여 장좌와 일종식을 하던 그가 뒤늦게 강원으로 돌아간 것은 두번의 사건 때문이었다. 기본적인 불교 경전조차 제대로 읽지 않은 채 선방만 드나들던 그가 불교의 기초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바람에 심한 망신을 당한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법주사 강원, 워낙 분심이 컸던 때문일까. 공부는 빨랐다. 강원 4년 과정을 1년반 만에 끝마쳤다. 그냥 끝마친 정도가 아니었다. 이때 한문의 문리를 트기 위해 자경문이나 능엄경, 맹자 등을 수백, 수천번씩 읽었다. 당시 그가 공부를 얼마나 치열하게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일화 하나. 문리를 튼 그가 대장경을 읽기 위해 해인사 율원 입시를 치렀다 실력을 인정받아 엉뚱하게도 강원의 선학(禪學)강사로 임명받은 것이다. 당시 나이 27세, 학인들이 젊고 공부 이력이 짧은 그의 강의를 보이콧할 정도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강사 생활 1년여 했는데, 그것도 체질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 길로 바랑을 싸서 외국으로 떠났지요. 일본, 동남아, 스리랑카, 인도, 유럽을 거치고 다시 인도로….” 해제철이면 해외를 떠돌고, 결제철이면 선방에서 안거에 들기 몇 차례던가. 배낭 여행이란 단어도 없던 시절, 그의 바랑 여행기는 훗날 ‘걸망속에 세계를 담고’란 제목의 책으로 묶여 나온다. 스님이 연극과 인연을 맺은 것도 이때쯤이었다. 그가 처음 본 연극은 ‘관객 모독’. 관중으로 분한 관람석의 배우가 무대위의 배우와 싸우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 내용을 모르는 그가 연극을 시작할 때 벌어진 싸움을 말리고 나선 것도 적잖은 해프닝이었지만, 관객과 배우, 삶과 무대를 드나드는 연극은 그에게 더 심한 충격이었다. 이를 계기로 연극에 빠진 스님은 해제철이면 어김없이 대학로에 나타난다. 한번 빠지면 몸을 던지는 그가 급기야 자신의 대본을 무대에 올리기에 이른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무대에 오른 작품이 10년 전쯤 공연된 ‘뜰앞에 잣나무’와 지난 5월 13일부터 대학로 김동수 플레이하우스에서 공연중인 연극 ‘지대방’. 그의 문화편력은 연극뿐 아니었다. 오래지 않아 명인, 명창, 명무판이 그가 즐기는 문화판 목록에 추가됐다. 스님의 이같은 문화판 순례는 훗날 그가 청주 불교방송 설립에 나선 것과 관계가 없지 않아 보인다. 청주 불교방송 본부장을 맡으며 관여한 중앙 종단, 스님이 조계사 주지에 이르게 되기까지는 잠깐이었다. “조계사는 한국 불교의 얼굴이자 상징입니다. 더욱이 한국 전통문화의 대부분은 불교 문화입니다. 그런데 불교문화의 상징인 조계사가 어떤 모습입니까. 세계 어디를 가도 자신의 얼굴을 이렇게 방치하는 곳은 없습니다.” 스님은 자신과의 인연이 1년밖에 안 되는 조계종 법장 전 총무원장이 그를 파격적으로 조계사 주지로 임명한 것은 조계사에 대한 이런 원력 또는 문제 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걸맞게 주지로 부임한 뒤, 그는 조용하면서도 속도감 있게 불사를 추진했다. 설왕설래만 하던 일주문 건축이 시작되는가 싶더니 어느새 번듯하게 마무리됐고, 20년간 계획만 무성하던 대웅전의 불상 교체를 비롯한 각종 불사계획도 빠르게 확정되고 실천에 옮겨졌다. 이런 속도감에 일부 반발도 없잖았으나 그는 문제 해결에도 명수였다. 마음을 터놓은 대화와 모든 것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그 비결이었다. 그럼에도 스님은 불사 지상주의는 찬성하지 않는다. 집 짓기 불사는 그것일 뿐,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불사를 하는 와중에도 조계사에 100개의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소장 스님의 기획 법회 등을 꾸준히 기획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계사에 공간이 생기는 대로 불교사회연구소, 문화재연구소 등을 만들려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4. 3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 말미, 기자는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에 대해 묻지 않았다. 새로운 것을 만날 때마다 놓아버리고 떠나온 삶, 그가 앞으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아갈지 스스로도 알 수 없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스님이 한국 불교의 새 지도자 반열에 올라 기자와 인터뷰한 것만 해도 그의 인생 계획과는 거리가 멀 터였다. “나름대로 진리와 아름다움을 열심히 추구해온 나의 삶은 7, 8년 단위로 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만족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또 떠날 것입니다. 새로운 결단이 필요한데도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은 뭔가 욕심이 있거나 현실에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에 걸맞게 늘 깨어 있으려 노력한 내 삶에서, 욕심이나 안주는 있을 수 없습니다.” 2년 전 조계사 주지로 부임할 당시 스님은 속옷 두어 벌, 책 두어 권 챙겨넣은 바랑 하나만 지고 왔다고 했다. 그렇게 살다 어느 순간 그는 “올 때처럼 걸망 하나 지고 훌쩍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약력 ▲무상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구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받음 ▲제방 선원에서 20여년 정진 ▲해인사 강원 강사 ▲청주불교방송 본부장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조계사 주지 |
기사 게재 일자 2006/06/09 |
출처 : 학타고 청산에 들어(마음산방)
글쓴이 : 마음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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