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경전, 선도

삼일신고(三一神誥) 음미/곽노순

마음산(심뫼) 2006. 7. 27.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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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신고(三一神誥) 음미

글/곽노순  (정신세계 2000년 10월호)

제1장 허공

제(帝) 이르되, 너희 오가(五加)의 무리들아, 파란 것이 하늘이 아니며,
까만 것이 하늘이 아니다. 하늘은 형질이 없으며, 시작과 끝도 없고,
위 아래와 사방도 없다. 비고 비어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품지 않은 것이 없다.
  
  말하는 주체가 한(漢)족이라면 총 366개의 한자로 된 이 글 조각은 전적으로 제(帝)의 것일 것이다. 그가 오늘날 우리들이 쓰는 한국어와 같은 우랄 알타이어를 하는 이였다면 글자 수를 윤년의 날짜 수에 의도적으로 맞춘 이 글의 형태는 기록자의 솜씨에 기인하였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록자나 후대의 번역자는 본래 말씀이 지닌 간결함을 반영한 것이리라.
  구름 한 점 없는 날 머리 위로 펼쳐진 돔은 파란색이고, 달이 뜨지 않은 밤 별들이 총총이 박힌 바탕은 까맣다. 파란색은 태양빛이 지구 대기 중의 먼지와 분자들에게 부딪쳐 산란을 일으킨 결과이고, 검은색은 태양계가 우리 은하계의 변두리에 위치하며 다른 은하들이 멀어져 가고 우주가 팽창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제는 창공(蒼空)이, 곧 천(天)일 수 없다는 현대인의 상식을 옛 인간들에게 귀띔해주는 품이다.
  그런데 그 천은 또한 사방이 없으며 시작도 끝도 없다고 한다. 그것은 원형을 뜻하는 것일까? 위와 아래도 없다고 하니 그것은 원형이 위로 퍼져 나가 다시 밑으로 와 닿는 도넛츠 모양의 Torus를 의미하는 것일까? 질이 없다니 에너지 장이나 역장이 Torus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형체가 없으며 비고 비어 있지만 있지 않은 데가 없다 하니 그것은 양자역학이 말하는, 찰나적으로 물질을 토해내기도 하고 다시 찰나적으로 흡입하기도 하며, 시공과 에너지 자체를 잉태시킨 ‘진공적 실체’를 암시하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가 깨우치려 하는 바는 인간의 오관이나 두뇌로 파악될 수 없는 비물질적 고차원(Higher Dimension)이 실재한다는 언명이며, 잠시 살다 스러져가는 존재들은 이 천(天)에 눈을 뜨라고 그의 가르침의 첫머리를 삼고 있다. 결코 파악될 수 없는 그림을 화두인 양 몸에 품고 마음에 품어보도록 하려는 것이다. 믿고 애쓰는 자는 실재의 현묘함에 눈뜨리라.
  
제2장 일신(一神)

신은 위 없는 으뜸 자리에 계시사 큰 덕, 큰 슬기, 큰 힘으로
하늘을 내시며, 무수한 세계를 주관하시고, 많고 많은 것을
창조하셨으니, 티끌 만치도 빠진 것이 없으며, 밝고도
신령하여 감히 이름하여 헤아릴 수 없다.
음성과 기운으로 원해 빌어도 친히 보이심을 끊으니,
저마다의 본성에서 씨알을 찾으라. 너희 머리 속에 내려와 계신다.

  
  제는 천이라는 현란한 그림을 던지므로 말씀을 시작하더니 다음에 신이 존재한다고 밝힌다. 천이 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바로 신이 내신 것이며,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 세계 하나만이 아니라 무수한 세계가 그로 말미암았다고 언명하는 것이다.
  인간이 닿을 수도 통화할 수도 없는 무수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정보가 도대체 무엇에 유익하단 말인가? 인류는 겨우 오늘에 이르러 우리 은하계에 2000억 개의 태양이 있다는 것과 또한 1000억의 은하들이 허공에 떠 있다는 이해에 도달했다. 헌데 땅이 모난지 둥근지 두께가 얼마인지 조차 가늠하지 못했던 옛 인간들에게 이런 그림이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우리와 유사한 종자들이 뭇 별틈에도 살아가니 존재론적 외로움을 극복하라는 뜻일까, 아니면 그 별세계를 향해 장도에 오르라는 유인일까?
  제의 뜻은 당시에 있지도 않은 문제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지어낸 신의 웅대함을 소개하는 데 있다. 신에게는 ‘덕(bene-volence), 혜(sagaciousness), 역(potence)’이 있어 만상을 창조하고 주관하신다고 한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 하는 기독교의 선언이 에코로 들리는 듯하다. 팽창하는 우주에 관련된 에너지량을 감안하면 역(力)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복잡성 이론이 발견하기 시작한 이치와 물리상수들이 지시하는 미묘함을 감안하면 혜(慧)가 의미 없지 않다. 그리고 덕(德)이란 아직 물리법칙에서 연결시킬 사항이 무엇인지 명확치 않으나 혹 땅에 떨어지는 참새 한 마리도 조물주의 관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예수의 언명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아무튼 제가 소개하는 만물의 창조주와 주재자 그리고 천을 낳은〔生天〕 신은 위 없는 ‘으뜸 자리’〔一位〕에 계신 이라고 한다. 여기서 잠시 멈추어 ‘제’에 관해 묻기로 하자. 산에 묻혀 구도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나라나 천하를 다스리는 군왕과 황제가 우주론적 또는 종교적 사항을 설파하는 것은 어떤 정황일까? 『환단고기』에 의하면 조선국의 제 11대인 도해(道奚)제가 기원전 1845년에 이 삼일신고를 연(演)했다고 한다. 거의 같은 시기 가나안 도시국가들 가운데 맹주격인 살렘성의 멜기세덱왕도 천지를 낳아 얻은(qanah) ‘지극히 높은 신’(El Elyon:God Most High) 을 거론하며 축복을 해주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3800여 년 전, 곧 유대교나 유교, 도교나 불교, 기독교나 모슬렘교가 생기기 전 청동기에는 동아시아와 중동에서 나라의 우두머리들이 사제직을 겸하며 백성들에게 창조신에 관해 가르침(誥)을 베풀었던 모양이다.
  제는 이렇듯 형용할 수 없는 하늘과 으뜸 자리에 계신 초월적 신을 소개한 후 홀연히 그 신이 이미 우리들 머리 속에 내려와 계시다는 또 다른 진리를 펴 보인다. 그는 압축형 글 조각에서 급전직하의 논법을 씀으로써 듣는 인간들에게 멈추어 생각케 하고 우리들의 내면이 물질에 예속된 것이 아니라는 지평에 눈뜨게 하는 것이다. 어느 때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하면서 또 어느 때는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고 공언함으로써 끝내 죽음을 자초한 예수의 표본이 후광처럼 떠오른다.
  
제3장 천궁

천(天)은 신국이라. 천궁이 있어 온갖 착함으로 섬돌을 삼으며, 온갖 덕으로
문을 삼았으니 신께서 계시는 데요, 뭇 신령과 뭇 밝은 이들이 호위하며 모셔
크게 상서롭고 크게 빛나는 곳이다. 오직 본성을 통하고, 공을 마친 자라야
들어가 뵙고 길이 쾌락을 얻는다.

  
  제1장에서 물질과 대비시켜 허허공공(虛虛空空)하다는 천을 여기서는 그 안에 거주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기술한다. 그곳은 신이 계심으로써 절로 다스려지는 영역, 곧 신국(神國)이요, 천궁(天宮)이며 그 건축물은 돌이나 벽돌, 철강재나 유리, 원자와 분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선과 덕이 곧 건축소재로 되어 있다는 기이한 설명이다. 우리는 오늘날 물질이 에너지와 등가성을 지니고 궁극적으로는 파동성을 지닌다는 이해에 도달했으며, 생각과 마음이 뇌파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런 물질세계가 출렁이는 파동의 뭉치로 파악되는 높이에서는 선과 악, 덕과 부덕이 보다 실체성을 띤 소재로 화할 수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다. 그럼에도 아주 먼 옛날 제는 그런 천궁의 실재를 백성들에게 말하고 있다. 그 안에는 육체를 입은 적이 없는 영들과 철인(哲人)이 거주하며 ‘좋음과 빛남’ 속에 있다고 한다. ‘좋음’이란 환경과 행위자들이 일체감을 이루었을 때 일어나는 분위기일 테고, ‘빛남’이란 전자와 원자핵과 같은 소재들이 높은 에너지 상태와 낮은 상태를 오르내릴 활력적인 여건에 항시 놓여 있다는 뜻일 게다. 여기서 우리는 ‘옥황’(玉皇)상제라는 표현을 떠올리듯 신을 ‘벽옥과 홍옥’으로 비유하며 네 영물과 구원받은 인간 원로들에게 둘려 있는 것으로 묘사하는 요한계시록의 장면을 상기하게 된다. 또한 예수도 신국(神國)을 지상에 소개하는 것을 주 메시지로 삼았으며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다’고 하여 그것이 단순한 환상이 아님을 역설하였는데, 조선국의 제는 그보다 오래 전 간단한 문장 속에 그런 초월세계를 묘사하고 거기 들어가 길이 쾌락을 얻을 비방을 제시한다.
  
제4장 세계

너희들 총총히 별려 있는 별들을 보라. 그 수가 다함이 없으며 크고 작음과
밝고 어두움과 괴롭고 즐거워 보임이 서로 같지 않다.
신께서 뭇 세계를 만드시고 해세계의 시자로 하여금 700세계를 거느리게 하시니
너희의 땅이 큰 듯하나 한 알의 세계이다. 속불이 터져 바다가 육지로 변해
마침내 모양을 나타냈다.
신께서 기운을 불어 밑까지 싸시고, 해의 빛과 열을 쪼이시니,
걷고, 날고, 탈바꿈하고, 헤엄치고, 심은 모든 것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초월적인 천궁을 소개한 후 제는 다시 눈을 물질우주로 돌려 별들의 세계와 태양계, 지구와 육지, 그리고 생물의 번성함을 열거한다. 인간의 현존재는 이런 그림에 속해 있기 때문이리라.
  전등과 TV가 발명된 이래로 인류는 실내에 갖혀 있기 일쑤요, 오염된 대기와 도시의 인공물에 가려 밤하늘은 거의 개념으로만 머리 속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옛시절 사방은 고요하고 머리 위로 보석상자를 쏟아놓은 천정은 속삭이는 소리마저 귀에 들릴 듯한 살아 있는 실체요, 멍하니 올려다보기만 해도 영혼의 갈망을 일으키기에 족했다.
  이런 별들의 세계를 신이 지어내셨다 하고 태양으로 하여금 우리가 모르는 700세계를 거느리게 했다는 정보도 흘린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수성에서 명왕성에 이르는 행성들과 뭇 위성들 그리고 무수한 혜성들 이외에 또 다른 천체들이나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일까?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제의 요지는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넓어보이나 사실은 겨우 그 여럿 중의 하나이며 작은 알약이나 구슬 모양으로 생겼음을 알리는 데 있다.
  이 땅에 영원히 살 것도 아니고 지구 반대쪽에 닿는 방도도 없을 텐데 이런 정보가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 대지가 무한으로 뻗은 평면이 아니라 구형이어서 한 방향으로 계속해 가면 출발한 지점으로 돌아온다는 영상이 인간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지구가 지극히 작은 구술이라 하면 욕심들을 버리고 더 큰 우주로 시선을 돌리게 될까? 또한 육지가 보는 그대로가 아니라 뜨거운 마그마의 바다가 식어서 지각으로 변했다는 식의 설명은 무엇에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신이 기운을 불어 땅의 밑까지 뭇 생물들이 있게 했다는 것은 필시 대기의 실체를 뜻하는 듯한데, 우리들이 숨을 쉬며 살아가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확인시키려는 것일까?
  그 해답은 이 아둔한 머리에 잡히지 않는다. 다만 이스라엘의 창세기에도 흙과 물 범벅을 신의 기운이 감싸며 휘돌고 있었다 하며, 물 속에 잠겨 있던 육지가 기어코 바다와 차별화 되었다는 언급을 한다. 삼일신고와 창세기의 이런 묘사는 신의 의식 에너지가 지구의 원자 분자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자기조직적 원리에 따라 생물들을 배태할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것일까? 혹은 생물 속에는 물과 흙, 불과 바람의 네 가지 요소가 복합해 있다는 암시일까? 아마도 우리가 커서 우리를 낳아주신 어머니의 수고를 기억하듯, 피조물은 적어도 자기가 생겨난 시원을 무의식에 새겨두어야 한다는 뜻인지 모른다.
  
제5장 인 물

사람과 뭇 것〔人物〕이 한가지로 삼진(三眞)을 받았으나 오직 무리들은
아득히 땅에 삼망(三妄)이 뿌리내려 진과 망이 서로 맞서 삼도(三途)를 지었으니
이르되, 성(性)과 명(命)과 정(精)이다. 사람은 온전하고 뭇 것은 치우친다.
  진성은 착하고 악함이 없으니 상철이 통하고, 진명은 맑고 흐림이 없으니
중철이 알고, 진정은 두텁고 엷음이 없으니 하철이 보전하니
돌이켜 참되면 일신(一神)이 된다.
  
  어떤 품목이 세상에서 멸절 됐는데도 그에 대한 명칭이 남아 있다면 혼돈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바로 5장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그런 정황에 놓이게 된다. 곧 진이니 망녕됨이니, 성·명·정은 도대체 어떤 개념이며 어디서 구체적인 예를 찾아볼 것인가? 그럼에도 안개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무생물과 생물을 구별하고 개나 돼지나 인간을 같은 생물 범주에 넣지만 옛사람은 인간과 인간 아닌 기타 물상으로 대별하고 있다. 자각이 있는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와의 구별이 요구되는 주제를 다루기 때문일까? 아무튼 제는 사람과 만물이 다같이 3가지 참을 받았다고 밝힌다. 사람은 좋든 나쁘든 전적이고, 만물은 치우쳤다 하니, 기린이 목을, 코끼리가 코를 지나치게 전문화시켰고, 벼룩은 항시 뛸 수밖에 없고 공룡은 항시 길 수밖에 없으나 인간은 걷기도 뛸 수도 있다는 포괄성을 함축하는 것일까?
  본시 인간과 만물이 이런 양태로 영 퍼센트의 악함, 영 퍼센트의 흐림, 영 퍼센트의 엷음을 평등하게 부여받았다고 하며 처음 것을 진성(眞性)이라, 둘째 것을 진명(眞命), 마지막 것을 진정(眞精)이라 이름 붙혔다. 그리고 차례로 상중하의 등급을 매겨놓았으니 착함이 100%인 진성은 만년설이 뒤덮힌 높은 산에 비기고, 맑음이 100%인 진명은 열대섬의 바닷가 풍경에 비기고, 두터움이 100%인 진정은 수목이 울창한 밀림에 비유해볼 수 있을까? 아무튼 상철은 신의 덕과 맞먹고 중철은 혜, 그리고 하철은 역에 맞먹는 것으로 구도 되었으리라. 그렇다면 3가지 요소로 존재를 규정하는 이런 방식은 어디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덕과 성을 소립자의 전기적 성질, 혜와 명을 소립자의 고유각운동량(spin), 그리고 역과 정을 소립자의 질량에 대비시켜봄직하다. 전하와 스핀과 질량은 소립자를 규정하는 불가결의 세 요소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물질존재의 밑바닥에 놓인 양성자나 중성자가 3개의 쿼크로 구성되었음이 판명되었듯이 인간적 존재와 초월적 존재도 3가지 구성요소를 지니는 것일까? 이제까지 개체의 쿼크들은 분리된 상태로 발견되지 않았으며 오로지 핵자를 구성하는 상태로만 존재한다. 그러니 유비적으로 신의 ‘덕·혜·역’이나 인간의 ‘성·명·정’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일체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는 난세포의 분열에서 1, 2, 4, 8 … 등의 분화과정을 보고, 원자 내부의 전자배치에서 2, 8, 8, 18, 18, 32 …의 수열을 보지만 만물의 기초를 이루는 핵자들인 양성자와 중성자의 구성에서는 3개의 1/3부분을 보는 것이다(3×1/3=1). 인간 존재의 구성을 세 가지로 파악하는 것은 이런 깊은 원리에 상응하기 때문이 아닐까?
  제는 인간이 삼진 상태로 돌이키면 한 신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고차원의 으뜸 자리에 본체를 두시고 그의 홀로그래픽적 분신을 인간들 두뇌 속에 감추어두신 신을 흠모하고, 세 가지 참됨을 추구해 얻으면 우리 속의 블랙 박스가 열린다는 말이리라. 절차만이라도 이 얼마나 간단한가!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을 가리켜 ‘신’이라, 또는 ‘신의 자식’이라 고백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일까 묻게 된다.
  그런데 제는 삼진으로부터 미궁으로 떨어지는 다른 코스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땅에 세 가지 미망, 헷갈림이 뿌리 박혀 삼진과 역동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르되, 마음(心)과 기(氣)와 몸(身)이니 마음은 성(性)에 의거하여
착함과 악함이 있으니 착하면 복 되고 악하면 화가 되며,
기는 명(命)에 의거하여 맑음과 흐림이 있으니 맑으면 오래 살고
흐리면 일찍 죽으며, 몸은 정(精)에 의거하여 두터움과 엷음이 있으니
두터우면 귀하고 엷으면 천하다.
  
  삼망은 다름 아닌 생리현상이 일어나는 육체와 몸 안팎을 돌고 있는 기운과 머리와 가슴을 통해 끊임없이 파장을 일으키는 마음이다. 우리들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여겼던 신체와 정신과 원기조차 망령됨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니 제는 육체도 아직 없고, 정신현상도 일으키지 않으며, 기운도 덧입지 않은 비물적 존재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는 해의 빛과 열로 뭇 생물이 지상에 번성토록 했다는 앞의 언명과 배치되는 것이다. 제는 무엇을 암시하려는 것일까? 지구에 생물이 들어서기 전에는 삼진을 보전하고 있는 비물질적 존재들이 거주한 적이 있다는 말일까? 생물이 진화되지 않은 행성은 그 자체로 삼진을 지닌 의식적 존재라고 보아야 할까? 혹은 태양신이 다스린다는 700세계 중 생물이 아직 출현하지 않은 세계는 밝은 이들이 거주하는 선계일까? 아니면 육체는 지녔지만 피부가 검고 건장하며 눈망울이 초롱초롱하면서도 그 얼굴 표정은 흙이나 바위를 닮은 지금의 호주 원주민과 같은 종자를 삼망에 떨어지지 않은 경우로 치는 것일까? 현실적인 다수의 인류와 상관없지만 이런 정황들을 그려보게 한다.
  아무튼 우리들은 무슨 이유, 또는 무슨 목적으로 인해 삼망이 뿌리내린 이 지구행성의 거주자가 되었고, 이로써 본래적 참과 지구행성적인 미몽이 겹쳐진 중력장에 놓인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떠보는 장이 없다면 참은 그저 세워놓은 자전거와 다를 바 없고, 미망의 장에서 참을 연출하는 것은 쓰러질 가능성을 각오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와 같을 것이다. 인생의 이런 유혹스런 과정을 지나면서도 본래적인 참을 보전한다면 그것은 강화된 참일 것이고 어쩌면 창조주는 이런 와일드 스포츠를 위한 터전으로 지구를 의도했는지 모른다.

 

이로써 인류는 착함과 악함, 기운을 맑게 보전하는 것과 탁하게 만드는 것, 두터움과 엷음 사이에서 선택을 하며 삶을 연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천년이 지나 오늘날 사회의 게임과 가치관의 다양화로 복잡한 정황이 되었지만, 문명이 단순성을 띠었을 고대에는 선택에 따라 복과 화, 장수와 단명 그리고 귀함과 천함이 선명하게 노정되었음직하다. 여기서 우리가 멈추어 생각할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복과 수와 귀를 얻는다 해도 그것은 하철(下哲)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이요, 둘째로 사회가 온갖 풍화작용을 나타낸 후대에 와서 스스로 단명과 천함과 화입음을 감수하면서도 상철(上哲)에 이른 예수의 케이스도 있다는 것이다.
  비유컨대, 산을 향해 길을 떠날 때 산봉우리에 이른 이도 있고 중턱에 이른 이, 그리고 산밑에 이른 이도 있다면, 길을 벗어난 무리 중 한 패는 꽃과 나무와 냇물이 흐르는 비옥한 평야에 들어서고, 다른 한 패는 흙바람이 불어대는 황량한 광야로 들어서는 경우가 있는 것과 같다 하겠다.

이르되, 느낌〔感〕과 숨쉼〔息〕과 닿음〔觸〕이라, 굴러 열 여덟 지경을 이루니
느낌에는 기쁨·두려움·슬픔·노여움·탐냄·싫어함이오. 숨쉼에는 향내·숯내·
추위·더위·건조·습함이오. 닿음에는 소리·색깔·냄새·맛·음란·다침이다.
  
  황량한 들판에는 여기저기 구덩이가 패어 있어 앞못보는 이는 더러 빠진다고 비유할 수 있을까? 삼진과 삼망이 변증적으로 작용한 끝에 초래되는 결과는 이런 세 가지 가짓길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실적인 우리의 모습을 볼 때 그것은 ‘더러’가 아니라 99.99%의 인류에 해당하는 정황이 아닌가? 그저 어지간히 합리적인 사회를 건설하려 한다면 이런 예리한 존재의 진단은 불필요한 것일 게다. 다만 육체의 눈에 허허공공 하면서도 내면의 직관으로 영원한 쾌락이 있다는 천궁을 그 목표로 삼을 때만 이런 서술은 중요한 정보가 된다. 그러면 이런 18가지의 구덩이에서 헤어나오는 길은 무엇인가? 제는 그 탈출방법을 제시하므로 말을 맺는다.
  
무리들은 착함과 악함, 맑음과 흐림, 두터움과 엷음을 서로 섞어서
가닥길을 따라 함부로 달리다가 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어, 죽는 괴로움〔苦〕에
떨어지고, 철(哲)인은 느낌을 그치며〔止感〕, 숨쉼을 고르며〔調息〕,
닿음을 금해〔禁觸〕 한 뜻으로 이루어 행하여 망녕된 것을 고쳐 참이 되고
큰 신기(神機)를 여니, 이것이 성품을 트고〔性通〕 공을 마침〔功完〕이다.
  
  우리들이 태어나는 것부터가 선악, 청탁, 후박의 상태를 혼합시킨 결과라고 보고 있다. 인간은 본시 어디서 출발한 존재일까? 신 이외에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불꽃으로 튀어나올 적부터 삼진과 삼망의 혼재로 시작했을 리는 만무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고, 자라고 … ” 하는 과정은 머나먼 창조시기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생긴 반복적인 패턴을 지시하는 것이리라. 최초로 이 지구행성에 태어나 삼망을 거치면서 강화된 삼진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망녕됨의 관성이 더욱 쌓여 거듭거듭 재수의 길을 걷는다는 의미일까? 어찌 됐거나 우리가 지금 구덩이 속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거나 황량한 광야에 있는 것으로 인지된다면 제가 제시하는 비방에 따라 철인의 지경을 다시 목표로 세워봄직하지 않은가? 곧, 느낌을 그치고 숨을 고르게 하며 접촉을 금하려는 큰 뜻을 세우고 실천에 옮기는 자, 곧 철인은 지구행성이 걸어놓은 삼망의 중력장을 벗어나는 것이라 한다. 이것이 조물주가 입혀놓은 성(性)을 철저히 통하고, “다 이루었다!”며 숨을 거둔 예수와 같이 신이 부여한 공(功)을 마친다는 뜻이다. 그는 슬프도록 착했고 무섭도록 맑았으며 우리들이 밟고 다니는 대지처럼 두터웠던 것이다. 기독교란 바로 이런 예수의 진성, 진명, 진정에서 신의 덕, 혜, 역을 보았다는 증언이다.
  철인은 지구 근처를 지나며 한번 내려다보고 은하계 중심을 향해 다시 날아가는 경우요, 유복자는 지구 둘레의 궤도를 도는 위성에 타고 있는 형편이요, 고(苦)의 패턴에 사로잡힌 이는 지구 표면에 눌러앉아 있는 꼴이다. 철인을 제외한 두 가지 범주는 여전히 탈출 속도를 얻지 못해 이 행성의 위치 에너지 우물에 갇혀 있는 경우이다.
  
  끝으로, 인생이 놓여진 그림을 한눈으로 보도록 명료하고도 간략하게 서술한 제가 고맙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구사하는 개념은 사회제도와 인간의식이 오늘날과 같이 복잡성을 띠기 훨씬 전 고대의 무대를 반영하고 있다. 복잡해진 병의 상태를 치유키 위해 세계에는 여러 종교가 출현했으며 많은 부작용을 산출시켰음에 반해 멜기세덱과 동시대에 조선의 삼일신고는 깨끗한 그릇을 갖추었다 하겠다. 우리 선조의 자랑스러움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는 기상이 있고, 담백함이 있고, 단거리 선수마냥 좌우를 보지 않고 앞으로 곧장 달려가게 할 힘이 있는 것이다.
  삼백 예순 여섯 자를 자주 읽고 싶어 하는 자 하철에 이른다. 그 속에 원형적인 모습이 있음을 보는 자 중철에 이른다. 그리고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이것을 택하겠노라 하는 이 어느날 상철에 닿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