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산을 가꾸며
-나의 교직관-
심뫼 엄영섭
1. 내 삶의 철학과 교직 선택 동기
나는 현재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서 교직 16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그 동안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 왔고, 또 무엇을 바라며 살아갈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시점인 것 같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나도 내 생을 놓고 무척이나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중․고교 시절 윤동주의 ‘서시(序詩)’를 읽으면서, 양주동의 ‘면학의 서’를 통해 맹자의 군자삼락(君子三樂)을 배우면서, 어떻게 사는 게 참된 삶이며, 진정한 행복인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독서와 배움과 갖가지 사색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여 오늘의 나를 있게 하였겠지만 교직을 선택하게 된 동기는 내 삶의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다음은 고3 때 지은 내 삶의 철학이 들어간 내 이름자 삼행 시조이다.
엄정한 마음가짐 군자절(君子節) 꽃피우고
영원한 진리 속에 몸 태워 밝힌 촛불
섭리에 길이 푸름이 심산(心山)에서 샘솟도다.
어느 날 나는 촛불 명상을 하면서 촛불처럼 살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촛불이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거룩한 뜻은 좋지만 바람 앞에 너무나도 연약함을 알고, 보다 영원한 것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마음의 푸른 산 가꾸기이다. 이 때부터 산은 내 그리움의 대상으로 자리하며, 내 삶의 철학적인 바탕이 되어 왔다. 내가 추구하는 정신 세계는 깊푸른 산이었다. 고교 시절 ‘십장생’이란 시조를 지으면서 내 삶 자체도 산이고자 했다.
솔가지 구름 걸려 거북 사슴 노니는 곳
둥근 돌 시린 물이 태양 빛에 영롱이니
학 타고 청산에 들어 불로초를 캐어 보렴
이처럼 나의 이상향을 설정해 놓고 내 마음도 푸른 산이고자 했다. 청산에 들어 진리의 불로초를 캐고 싶었다. 퇴계 선생의 시조처럼 만고에 푸른 청산, 주야에 그치지 않는 유수(流水)가 되어 만고상청(萬古常靑)을 하고 싶었다. 산의 초목이 태양의 은혜를 받고 자랐듯이 나도 그 혜택을 남에게 주는 삶을 원했다. 깊푸른 산이 된다면 신선한 공기는 끊임없이 제공될 것이며, 맑은 물은 흘러 넘칠 것이며, 온갖 짐승들이 깃들 수 있을 것이며, 구름은 신비롭게 산을 감쌀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92년부터 선도(仙道)수련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나는 더욱더 산의 고마움을 느끼며 산과 하나가 되어 갔다. 산은 내게 정기(精氣)를 전해 주며, 천지 기운을 느끼게 해 주었다. 현실적으로도 나는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산에 깃들여 살면서 산을 사랑하여 왔고, 지금도 한 산악회의 등반대장을 맡으면서 즐겨 산을 찾고 있다.
한편 사춘기 시절, 내게는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슬픈 일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교를 갓 졸업한 형님이 죽고, 이듬해에는 여동생이 죽고, 그 다음해에는 55세 되신 아버지 마저 갑자기 돌아 가셨다. 이러한 죽음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 삶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맹자의 진심장구에서 천하에 왕 노릇 하는데 즐거움이 있지 아니하고, 부모가 함께 살아 계시고, 형제가 탈이 없는 게 첫 번째 즐거움이요, 우러러 하늘에 부끄럼이 없고, 굽어보아 사람에게 부끄럼이 없는 게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게 세 번째 즐거움이라 하였는데, 이를 내 삶과 결부시켜 보면서 첫 번째 즐거움이 나에게 거리가 먼 이상, 두 번째 즐거움은 평생 나의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가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세 번째 즐거움을 얻기 위해 교직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내 비록 깨어나 있지 못해 황량한 산이라 할지라도 나무를 심고 가꾸는 정성으로 살아간다면 언젠가 그 산은 울창해 질 것이고, 영혼의 안식처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푸른 산을 생각하며 나무 한 그루라도 심고 가꾸는 정성으로 살아간다면, 늘 큰바위 얼굴을 생각하던 사람이 언젠가 큰바위 얼굴이 되듯이, 나도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2. 그리움에서 깨달음으로
한 때 내 삶의 화두(話頭)는 ‘그리움’이었다. 교직을 선택할 때에도 학생들에게 무한한 그리움의 꿈을 심어 주고 싶었다. 내가 추구하는 청산에 대한 그리움, 이상향에 대한 그리움, 먼 곳에 대한 그리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 학문에 대한 그리움, 그리운 이에 대한 그리움! 이처럼 그리움의 대상은 너무나도 많았다. 까닭 없이 마음 외롭고 무언가가 그리울 때도 많았다. 전생의 본향에 대한 그리움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그리움은 나를 문학 쪽으로 인도하여 국어 과목을 좋아하게 하고 국어 교사가 되게 했다.
교직을 맡으면서 나의 화두는 ‘깨달음’ 쪽으로 바뀌어 갔다. 우주와 나와의 관계, 자연과 나와의 관계, 남과 나와의 관계 속에 내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궁구(窮究)하는 철학적인 자세를 갖게 되었다. 우리 반의 급훈도 ‘생각하라 그리고 깨달아라’로 정해 놓고 학생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교육을 하고 싶었고 더러는 그렇게도 해왔다. 수업시간 이외에도 조례시간에 명상의 시간을 갖거나, 불교학생회 지도 교사, 특별활동의 기공, 태극권 지도 교사를 맡으면서, 학생들에게 깨달음의 즐거움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도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라는 소월의 시구(詩句)처럼 내가 꽃이 되지 못한 상황이다.
얼마 전 노암 촘스키가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에서 “훌륭한 교사란 왜곡된 정보를 바로잡고 진실을 얘기할 수 있으며 학생들이 스스로 진실을 깨칠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진실을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찾아가며, 역사의 방관자로 남지 말고 역사의 참여자가 되라고 한 말을 상기해 보면서, 학생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좋은 선생님이 되도록 더욱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다.
3. 참과 너그러움으로
좋은 선생님이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연찬(硏鑽)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며, 교사의 노력에 의해 좀더 잘 꿰어질 때 더욱 값진 보배가 될 것이다. 교사에겐 유능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한 가르치는 기술 이외에도 마음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 마음 바탕으로 ‘참’과 ‘너그러움’을 말하고 싶다.
내가 유독 좋아하는 말에 ‘참’이라는 게 있다. 한자어로는 ‘정성 성(誠)’자가 되겠는데, 이를 아주 좋아하여 내 삶의 좌우명으로 삼아 왔다. ‘맹자’에 이르기를 “참된 것은 하늘의 도리이며 참된 것을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이다.”하여, 지극히 성실하다면 남을 감동시키지 못할 것이 없다고 하였으며, ‘참전계경’의 성장(誠章)에서도 “정성이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서 자신의 참본성을 지키는 것이다.”라 하여 ‘참’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정성’은 인성교육의 바탕이 되어야 할 말이라고 본다.
또한 ‘너그러움’의 미덕이 있어야 대인 관계를 원만히 잘 이끌어 갈 수 있을 것 같다.
몇 해 전 어느 날, ‘사서(司書)’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내가 교감선생님과 함께 도서실에 들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도서실이 난장판이었다. 선배들이 후배에게 물려줄 학습참고서를 도서실에 늘여 놓고 재학생으로 하여금 가져가게 하였는데 서로 가져가느라고 그랬는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그 순간 나는 꾸지람을 당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교감선생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손수 흩어진 책과 인쇄물, 종이 조각들을 주워 모으시는 것이었다. 뒷정리는 내가 마쳤지만 그 교감선생님(지금은 퇴직하셨지만)의 너그러움이 내게는 큰 감동으로 남아 있다. 교과서에서 다루는 처용의 너그러움보다 내게 있어서는 훨씬 교육적 효과가 큰 가르침이었다.
4.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나는 불지종찰의 대가람 통도사 밑에 살면서 어린 시절부터 불교를 많이 접하게 되고, 또 불교 재단의 중학교를 3년간 다니게 되고, 대학 1학년 때에는 1년간 절에서 살게 되고, 3, 4학년 때는 대불련 활동을 하게 되었다. 또 그러한 인연으로 불교학생회 지도교사를 맡게 되고, 동부경남 교사불자회(현, 울산교원불자회) 창립 회원으로 참가하여 지금껏 활동하고 있고, 통도사 불교 청년회 창립에도 동참하는 등 종교적인 활동도 많이 해 왔다.
그런 중에 너에게 돌이켜 볼 때 지혜가 열린다는 반야(般若)를 좋아하며, 호흡을 바라밀(波羅蜜) 즉 비단물결처럼 꿀처럼 달콤하게 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실천적인 행위를 좋아하며,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말과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라는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나만 잘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남이 동시에 성불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교사는 모름지기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보살도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이는 나의 교육대학원 입학 동기와도 관계된다.
5. 성통 공완(性通功完)
내가 보기에 우리의 교육은 우리 민족의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 제5장 진리훈에 보이는 성통 공완(性通功完)하는 쪽, 다시 말해 바로 성품을 트고 공적을 완수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에는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 수련이라는 전문적인 수련과정이 필요하겠지만, 학교에서는 전인 교육을 지향하여 교육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고 보아진다.
우리의 ‘천부경(天符經)’ 중에는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이라는 구절이 있다. 자기의 본성을 태양처럼 환하게 밝힌 자에게는 하늘과 땅이 하나로 녹아 들어가 있다는 말로, 이는 성통한 자, 즉 참된 깨달음에 이른 자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인간들은 절로 진리로써 세상을 열어 갈 것이며, 우리의 교육 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을 구현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공부해서 남 주나’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공부해서 남 주자’를 강조하고 싶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알고 진리를 깨달아 이웃에 봉사할 수 있는 맘이 열릴 때 진정 이 세상은 밝아지지 않나 싶다. 학과 공부만 잘 하는 학생보다는 참된 인간성을 갖춘 학생에게 더 정이 가듯, 인성의 바탕 위에서 창의성을 열어 주는 교육을 바라고 싶다.
6. 마무리
오랜만에 내 마음의 산을 생각해 보았다. 언젠가 그리움으로 가득 찬 나의 산에서 이제는 하나하나 깨달음을 추구해 가고자 한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마다 참된 꿈이 넘치고, 바위처럼 변함없는 너그러운 자태로 새소리도 들어가며, 물소리마다 정겹고, 꿈꾸며 사랑하기에 넉넉한 푸른 산을 가꾸고 싶다. 학생들과 함께 선학(仙鶴)을 타고 진리의 불로초를 캐어, 영원한 즐거움을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학생이 있어 즐거운 삶, 그것이 교사로서의 보람된 일일 것이라 생각하며 이만 글을 접는다.
2001.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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