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의 욕설, 이대로 좋은가
교사 엄영섭
요즘 학생들은 입이 많이 거칠다. 욕설을 함부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때로는 욕설이 생활에 카타르시스를 줄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을 상하게 한다. 심하면 폭력이 되어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더불어 잘사는 길은 서로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되리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이유에서건 욕설이 오간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에 보이는 인력거꾼 김첨지의 아내에 대한 욕설은 차라리 정이 살아 있다. 그런데 학생들이 비판 없이 사용하는 욕설의 효용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오늘도 학생들의 욕설이 들려오고 있다. 이들의 욕설을 이대로만 두고 볼 것인가? 이에 그들의 자각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에서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욕설’을 사전적으로 정의해 보면, ‘남을 모욕하거나 저주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남을 모욕하거나 저주해서 자신에게 좋은 점이 무엇이 있겠는가? 영화 <황산벌>이나 <평양성>에서 적의 성을 공격하기 위해 전략상 하는 욕설이라면 재미있게 봐줄 만하다. 또한 비속어를 통하여 즐거움과 재미를 선사한다든지, 어떤 목적과 신념을 가지고 풍자와 개그를 구사하는 ‘욕 대회’ 같은 것은 그런대로 의미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학생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욕설은 문제가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듯이, 혼자서 하는 욕설도 삼갈 일이라고 본다.
필자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 늦가을의 어느 수업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담임선생님께서 바쁘신 일로 반장인 나한테 자습지도를 부탁한 바가 있었다. 그때 어떤 계기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반 아이들에게 ‘욕하기 시합’을 해보자고 제의를 했다. 그런 뒤 나부터 교단에 올라가서 욕설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그때 한 욕설 중의 일부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먼저 “남이야 벌거벗고 탱자나무에 올라가든지 말든지, 남이야 전봇대로 이쑤시개를 하든지 말든지...” 등으로 가볍게 몸을 푼 뒤, 본격적으로 비속어의 욕설을 토해내었다.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즈음에 그만 큰일이 나고 말았다. 때마침 복도를 순시하시던, 엄하기로 소문이 난 교감선생님께 들키고 말았던 것이다. 그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물론 잡혀 간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교감선생님께서 나보고 교무실에서 꿇어 앉아 있든지, 아니면 운동장에 넓게 깔린 낙엽을 빗자루로 깨끗하게 쓸어 내는 두 가지 벌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셨다. 산골에서 자라 빗자루질에 자신이 있었던 나는 운동장 청소를 택했다. 그때 나는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터지기도 하는 청소를 하면서 평생에 할 욕을 다 쓸어버린 것 같았다. 그 뒤로 나는 지금껏 욕을 하지 않는 착한 사람(?)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나의 초창기 교단시절에도 학생들의 욕설이 더러 귀에 들렸다. 그때 교육의 한 방편으로 ‘욕절하기’라는 벌로 학생들을 지도한 바가 있었다. 이 벌은 욕을 한 사람이 욕을 들은 대상자에게 그 자리(주로 복도)에서 큰절을 올려서 사죄하는 것이었다. 꽤나 성과가 좋아 몇 년간 거의 욕설이 들리지 않았었다. 그런데 <주유소 습격 사건>이나 <친구> 등의 영화가 나오고부터 마치 욕설이 젊음의 특권이라도 되는 듯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서 지도가 어렵게 되었다. 욕설은 이미 많은 학생들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습관이 되어 버린 것 같다.
하지만 학생들의 ‘욕설 안 하기’에 대한 교육은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이루어져야겠다는 생각이다. 공익광고를 통해 자주 홍보 교육하는 것도 좋은 방편의 하나이겠지만, 이는 먼 바다의 이야기 같다. 우선 학교에서 졸졸거리는 시냇물을 유유히 흐르는 강물로 유입하는 교육부터 해볼 일이다. 욕설근절은 필자의 경우처럼 어떤 계기가 마련되든지, 아니면 교양인으로서의 철저한 자각이 뒤따라야 가능할 것이라고 보아진다. 그 자각을 도와주는 일이 우리 교사의 몫이기도 하다. 교양이란 남의 고충에 대해 생각해 주는 배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교양인으로서의 인성을 갖추도록 돕는 일이 교육의 과제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이며, 교육이념이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이지 않는가? 우리는 옛날부터 남을 부를 때 ‘님’이라는 말을 써 왔고, 인사말을 할 때에도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 ‘님’이라는 용어는 ‘니마’에서 온 ‘태양신’이며, ‘고맙습니다.’의 ‘고마’는 ‘태음신’이라고 한다. 이처럼 우리는 남을 ‘신(神)’처럼 존중할 줄 아는 미덕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불교의 한 경전인 <천수경>에서도 입으로 지은 죄업부터 깨끗이 씻겠다는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부터 시작하고 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입으로 짓는 죄가 그 얼마나 많은가? 우선 깨끗이 속죄부터 하고 볼 일이다. 이런 우리가 남을 모욕하거나 저주하는 욕설을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결론적으로 욕설 근절에 대한 자각과 실천방안으로 다음 두 가지를 들고 싶다. 우선, ‘역지사지(易地思之)’이다. 이는 남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말의 실천은 바람직한 인성 함양과 함께 바로 욕설 근절은 물론, 홍익인간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고 보아진다.
다음으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이다. 이러한 말을 자주 사용한다면 상대방도 분명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상대방과의 거리를 좁히는 일은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상대방이 적이 아니라 나를 위해 존재하는 고마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가 먼저 가는 말을 곱게 할 일이다. 그러면 반드시 오는 말도 고울 테니까.
욕설이 없는, 말씀이 향기로운 사회! 이는 서로를 존중하며 살고 있다는 참으로 바람직한 모습이지 않겠는가? 그런 세상을 기대해보며 이만 글을 접는다.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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