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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관조법
(앞부분 생략)
이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연장선상에서 한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곧 생활 속에서, 또 기도하고 참회하며 고무풍선 과 같은 '나'의 실체를 자꾸 관조(觀照)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여러 번 이야기하였듯이 우리들 삶의 모든 문제는 "아(我)'에 봉착되어 있습니다. 아(我), '나와 내 것'이라는 그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무풍선과 같은 자아가 본래 무일물이요 공(空)이라는 것을 관조하며 닦아가야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삶, 대우주 법계인 진공(眞空) 속의 묘용(妙用)을 한껏 발현하여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유롭고 청정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결코 '나(我)가 공(空)'이라는 색즉시공의 깨달음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원리로는 '알았다'고 할지라도, 현실에서 '색이 곧 공'이라는 진리를 생활화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중생이라는 탈을 쓰고 세세생생, 너무나 오랫동안 자아의 노예, 이기심의 노예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색에 대한 집착, '나'에 대한 집착, 욕망에 대한 집착을 '비워야지 비워야지' 하면서도 문득 '나'에게 맞으면 탐심을 일으키고, '나'에게 맞지 않으면 분노·짜증·신경질 등의 진심(瞋心)을 내며, 탐심·진심을 좇아 갖가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것과 동시에 교만·의심·고집까지 동원하여 '나'의 행복과 평화로움을 가두어 버립니다. 마치 고무풍선을 '나'를 삼고 그 속에다 온갖 것을 가두어 놓는 것처럼 따라서 참으로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고자 한다면, 평소에 '색즉시공 공즉시색'·'본래무일물'을 바탕으로 삼아 자아의 그릇된 흐름, 나의 이기적인 의식을 자꾸자꾸 관조하여 깨우쳐 나가야 합니다. 본래무일물인 자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이기적인 자아가 숨어 활동하는 곳을 현대 심리학에서는 잠재의식이라 하고, 불교에서는 여덟 가지 식(識)의 단계 중에서 일곱 번째 있다고 하여 제7식(第七識) 또는 '마나스(manas)識'이라고 합니다, 이 마나스식을 영어로는 에고(ego)식'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최전방에 있는 것은 전5식(前五識)으로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 다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전5식이 작용하여 살생·투도·사음·망어·악구·양설·기어 등의 업을 짓습니다.
그런데 전5식과 관련된 그릇된 행위들은 제6식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모두가 제6식인 의식(意識)에서 일으키는 탐욕(貪)·분노(瞋)·어리석음(癡)·의심(疑)·고집(見)은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것인가?
바로 제7식의 아치(我癡)·아견(我見)·아애(我愛)·아만(我慢)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7식 마나스식(ego식)을 꿰뚫어 보고 다스리면 제6식 및 전5식과 관련된 허물들은 저절로 소멸됩니다.
하지만 이 제7 ego식은 일상의 의식 표면에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라 잠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거의 느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아주 주위를 기울여야만 이 식의 네 가지 이기적인 움직임을 관찰 할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 넷을 열거하겠습니다.
·아치(我癡) : 무아임을 모르는 어리석음
·아견(我見) : 나를 내세우는 고집
·아애(我愛) : 나만을 중히 여기는 자기사랑
·아만(我慢) : 내가 더 잘나야 한다는 생각
제7 ego식에 잠재되어 있는 네 가지 '나(我)'를 잘 관찰하고 느낄 수 있으면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이 급격히 사라져, '나가 본래 비었다'는 아공(我空)과 '내 것이 없다'는 법공(法空)을 깨달 수 있게 되고, 일상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탐·진·치·만·의·견은 물론이요 모든 좋지 않은 삶의 양상에서 해탈할 수 있게 됩니다.
곧 제7 ego식을 잘 다스리면 자아의 고무풍선이 저절로 터지게 되며, 마침내는 제8식과 제6식의 통로를 차단하여 근본무명(根本無明)까지 사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럼 잠재되어 있는 아치·아견·아애·아만은 어떻게 감지할 수 있는가? 보통은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마음이 아주 고요할 때, 둘째는 '나'를 자꾸 되돌아보고자(觀照)할 때입니다.
마음이 아주 고요할 때란 참선 등을 통하여 삼매(三昧)에 젖어든 때로, 이때는 ego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투영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삼매의 경지가 보통사람들에게는 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참선 등을 할 때는 이러한 것이 보이는 것까지 일종의 마구니(마장, 장애)로 보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따라서 자꾸자꾸 '나'를 관조하여 ego를 감지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첫째, 먼저 참회를 하십시오.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는 참회는 '잘못 했습니다'로부터 시작됩니다. 절을 하면서 참회를 해도 좋고, '관세음보살'·'지장보살'·'마하반야바라밀' 등의 염불을 하면서 참회해도 좋습니다.
둘째, 겉으로 염불 또는 절을 하고 마음속으로 '잘못 했습니다'를 염하다가 과거의 어떤 잘잘못이나 현재의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 그것이 아치·아견·아애·아만의 어느 것에서 비롯되었는가를 관조해 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어제 친구를 만나 거만한 자세로 퍼부었던 핀잔. 그 핀잔의 밑바닥에 아만이 깔려 있었구나. 고쳐야지.' '지난 주 있었던 부부싸움. 왜 서로가 참지 못했던가? 그 원인은 아애(我愛)때문이었다. 서로 사랑한다면서 아애만 실컷 뿜어대다니.' '아이가 오늘 하루는 공부를 쉬고 친구들과 놀았으면 하는데 못하게 했다. 쉬는 것도 공부인데, 내 마음속의 고집과 어리석음으로 못하게 하였구나.'
이와 같이 하여 아치·아견·아애·아만을 깨닫기만 하여도 '나'의 삶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곧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게 굴고, 교만을 부리고, 의심하고, 고집을 내세우는 탐·진·치·만·의·견의 모든 상황이 잠재된 '나', 숨어 있는 '자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자아의 풍선껍질은 옅어지고 '나'는 평안과 행복을 누리기 시작합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인 '나'가 사라지는데 어찌 행복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셋째, 물론 이와 같은 관조는 한두 번으로 끝낼 일이 아닙니다. ego에 대한 관조는 자꾸자꾸 해야 합니다. 내가 겉으로 행하였던 살생·투도·음행·망어·악구·양설·기어와 속으로 일으켰던 탐·진·치·만·의·견이 나도 잘 느끼지 못하는 아치·아견·아애·아만에 조정 당하였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다시는 그와 같은 행위나 생각 속에 빠져들지 않을 때까지 자꾸자꾸 관조하고 참회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밑바닥에 깔려있는 ego식을 관찰하고 느낄 수 있게 되면 바로 보살의 지위에 올라서게 됩니다. 처음 시작하면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이 되고, 익으면 십지(十地)의 보살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꾸준히 계속하다보면 마침내는 자아의 고무풍선이 터지고 무명이 사라져 주객불이(主客不二)의 세계,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이것은 제가 만들어 낸 관법이 아니라 신라의 원효대사를 비롯한 많은 고승들이 이 관조법을 익혔고, 이를 통해 높은 경지로 나아갔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 생활화하느냐 못 하느냐는 오로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마하심의 입장에 서서 '나'를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있습니다.
물론 꼭 참회기도를 하면서 관조를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꾸준히 관조만 하여도 삶이 훨씬 좋아집니다. 행동이나 대인관계에서 일어나는 일, 내면적인 생각들을 잘 관조해 보십시오. 참으로 이기심(ego)에 뿌리를 둔 생각들이 수도없이 일어났다가 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잘 다스리는 것. 곧 이 생각들이 무명에 뿌리를 둔 이기심에 의해 덧없고 실체없이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아 그 ego를 놓아버릴 때 우리는 색즉시공을 성취하게 되고, 그 즉시에 공즉시색의 대자유와 대성취를 만끽할 수 있게 됩니다.
정녕, 이론만의 반야심경이 아니라 생활 속의 반야심경이 되게 하고자 이 관조법을 제시하오니, 꼭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아치·아견·아애·아만', 이 네 단어를! 이 네 단어가 바로 관자재(觀自在)입니다. 이 아(我)를 잘 관찰하는 것이 관자재의 관(觀)이요. 이 아(我)를 비워버리면 저절로 모든 것은 '자재(自在)'해 집니다.
두손 모아 축원 드리옵니다. 모든 불자들이여, 아치·아견·아애·아만을 관조하여 꼭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경지를 체득하고 대자재와 대평화와 대행복의 묘용을 한껏 누리옵소서.
마무마하반야바라밀. (끝)
<불교신행연구원 김현준 원장님의 글, 법공양 2005년 8월호>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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