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관광 여행

조지훈의 빛을 찾아 영양을 다녀와서(100728~29)

마음산(심뫼) 2010. 8. 2.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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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여행 답사기> 

조지훈의 빛을 찾아 영양을 다녀와서

 

                                                                                           심뫼 엄영섭

 

  

  우리는 보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나와 또 다른 세계와의 소통을 희구하며 진리의 세계화를 위해 사는 삶을 보람으로 여긴다. 세상에는 소통하는 길이 많을 것이고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일반적인 방법 중의 하나가 문학이요, 여행일 것이라는 데는 공감한다. 이 둘을 합친 문학여행은 대상 작가의 정신세계와 교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보인다. 산행과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그간 전국의 이름 있는 산과 유명한 사찰은 거의 다 다녀온 편이다. 이에 비해 문학여행은 아직 많이 모자란 것을 느낀다. 그 동안 나는 보길도에서 윤선도, 고창에서 서정주, 강진에서 정약용과 김영랑, 안동에서 이육사, 평창에서 이효석, 춘천에서 김유정, 옥천에서 정지용, 담양에서 면앙정 송순과 송강 정철 등을 만나고 왔다. 그러나 아직 가야할 곳이 많다는 것은 윤동주의 말처럼 내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으로 좋게 해석하고 싶다. 누군가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고 했던가.

  올해의 문학여행지는 경북 영양을 택했다. 여기도 그 언젠가부터 꼭 다녀와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는 곳 중의 하나이다. 그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조지훈의 유적을 직접 대하면서 그  정신과 교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번의 여정으로는 이곳 양산에서 경주와 포항, 그리고 영덕을 경유하여 영양으로 가는 것으로 잡았다. 가는 길에 서석지와 선바위를 둘러본 뒤, 감천마을 어귀에 있는 오일도의 시비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영양 군청부근에서 1박을 한 뒤,  주실마을에 가서 조지훈을 만나고, 다음에는 두들마을에 가서 이문열을 느끼고 궁중요리서를 쓴  정부인 장씨를 알현하고 오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다.

  2010년 7월 28일(수)과 29일(목), 방학 중 등교하지 않아도 되는 1박 2일을 잡아 아내와 둘이서 영양 답사여행길에 나섰다. 출발은 차량문제로 인해  점심식사 후에 하게 되었다. 때는 마침 장마의 막바지라 호우주의보가 내릴 정도로 큰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떠났다.

  경주와 포항을 지나 푸른 동해를 잠깐 대하고 영덕서 안동 방면으로 방향을 잡았다. 길가에서 복숭아 한 상자를 사서 차에 싣고 영양으로 접어드니, 선바위와 남이포가 우리를 반긴다. 이곳은 홍보지를 통해 사진으로 보았지만 자연과 전통이 어우려진 영양의 상징물처럼 여겨졌다.

 

   선바위를 옆에 끼고 먼저 찾은 곳이 연당마을의 서석지이다. 이곳은 보길도의 세연정, 담양의 소쇄원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전통 정원에 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조선 광해군 5년(1613년)에 성균관 진사 석문 정영방 선생(1577년~1650년)이 '자연과 인간의 합일 사상'을 토대로 만든 조선시대 민가 연못의 대표적인 정원이다.

   세연정과 소쇄원에 비해 관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아 다소 안타깝긴 해도 집주인의 정신만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서석(瑞石)은 상서로운 돌이라는 뜻이고, 지(池)는 연못이다. 여기에는 모두 90여개의 서석이 있는데 상운석, 와룡암, 선유석 등 저마다의 이름을 지니고 있어 그 나름의 독특한 정취를 느끼게 한다. 안영선씨가 <살아 있는 문학여행 답사기>에서 이곳이 조지훈의 시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라고 하였는데, 고풍스런 유교적인 정원인데 선(禪)적인 느낌이 들었다. 때마침 연못에서 지고 있는 연꽃향기를 머금어 보다가, 수령이 400년이 넘은 은행나무 보호수에  세월의 간격을 느끼면서 오래 머물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 했다. 연당마을이라는 이름 자체도 마음에 들었지만, 태화당고택을 비롯하여 많은 전통 고가옥들이 밀집해 있어서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인상이었다. 그리고 이곳을 찾는 이가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이 선바위 관광지구다. 선바위와 남이포가 장관을 이루고 있는 이곳은 휴게소를 겸하고 있었는데,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주위의 시설물로는 영양산촌생활박물관, 분재수석전시관, 동굴형 민물고기 전시관, 고추홍보관 등이 있었다. 고추홍보관을 둘러보고 영양의 고추가 유명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이곳을 나와 감천마을 어귀에 있는 오일도 시비를 찾아 갔다. 31번 국도변에 오일도의 시 <저녁놀>이 우리를 반겼다. 오일도는 바로 이 영양의 감천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선문단 4호에 '한가람백사장에서'로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1935년에 사재를 털어 최초의 시 전문지 <시원>을 창간하였다. 이는 5호까지 발간되었으며 시문학을 풍요롭게 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어느 책에선가 읽었는데, 오일도의 처가가 조지훈의 고향인 주실 마을이라 그는 조지훈에게 시문학에 대한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작은 방안에
   장미를 피우려다 장미는

   못 피우고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

   모가지 앞은 잊어버려라
   하늘 저 편으로
   둥둥 떠가는
   저녁놀!

   이 우주에
   저보담 더 아름다운 것이

   또 무엇이랴 !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


   붉은 꽃밭 속으로
   붉은 꿈나라로.  <오일도의 시 '저녁놀' 전문>


   시비(詩碑)를 사진으로 담고 시를 읽으면서, 이 우주에 붉게 타는 저녁놀보다 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날이 저물고 있어서 오일도의 감천마을에는 가보지 못하고, 붉은 꿈나라를 위해 영양읍 중심지로 향했다.

   영양군청 부근에 숙소를 잡아 두고, 마음에 드는 곳이 보이면 식사도 할 생각으로 거리에 나섰다. 스치는 사람들이 순박해 보여서 좋았다. 가로등이 고추와 반딧불 모양으로 조형되어 있었는데, 설계자의 아이디어가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읍내를 한 바퀴 돌아 본 뒤, 숙소 근처 식당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그런 뒤 다시 숙소에 들려 홍보지와 준비해 간 책자를 통해 다음 날 여정을 챙겨 보며 일월산의 정기가 서린 영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7월 29일, 아침에 창문을 열어 보니 일기예보대로 장마도 끝나고 날씨가 좋았다. 뙤약볕이 구름을 마구 피어나게 하고 있었다. 전날 저녁에 읍내를 돌아다니다 사 둔 빵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 9시경에 숙소를 나섰다. 영양군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이라고 자랑하는 주실숲을 지나니 차량에 부착된 네비게이션과 이정표를 통해 눈에 들어 오는 마을이 주실마을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이 주실마을은 조용헌의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에 의하면, 세 개의 문필봉 정기를 타고 한 마을에서 박사만 14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재물과 사람과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는 '삼불차(三不借)'. 이 원칙을 400 여 년 가까이 지켜온 조지훈의 생가 호은종택이 있는 곳. '지조론(志操論)'을 당당히 말할 수 있었던 조지훈의 고향 마을! 이곳이 내가 그토록 와 보고 싶었던 곳이다. 발길 따라 마음이 머무는 땅임이 틀림없었다.

  이 마을에서 먼저 찾은 곳이 지훈 선생이 태어나신 호은종택이었다. 이는 주실마을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으며, 조선 중기 인조조에 입향조인 조전의 둘째 아들 정형(廷珩)이 창건했다고 한다. 'ㅁ'자형 구조로 되어 있고, 정침과 대문채로 나뉘어지며 솟을대문이 조화롭게 여겨졌다. 여기와 조지훈 본가에서 관심있게 지켜 본 것이 문필봉이었는데, 산의 형태가 글을 쓰는 붓과 흡사하게 생겼으며, 풍수지리학적으로 일직선상에 안산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조동일 교수도 이 마을 출신이니 과히 일월산과 문필봉의 정기가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발길 따라 호은종택에서 지훈문학관으로 가는 길에 찾은 곳이 '지훈시공원'이었다. 마을 어귀에서 <빛을 찾아 가는 길>이라는 시비 하나만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웬 횡재인지 여기서 많은 시들을 대할 수 있었다. 때마침 관람객들이 없어서 애송시들을 큰 소리로 낭송해 보기도 했다.  내가 지훈의 시 중에서 특히 좋아하는 구절은 <파초우>의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는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이고, <승무>에서는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이다. 그 밖에 수능에 출제되기도 한 <석문>도 보이고, <완화삼>, <고사> 등 27편의 시비가 진열되어 있어서 마음 즐겁게 한참이나 머물다가 '지훈문학관'으로 향했다. 

 

 

  '지훈문학관'은 단층으로 지어진 목조 기와집으로 세련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는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 조지훈 선생을 후세에 길이 기리기 위해 건립한 문학관이다. 문학관 입구 오른편에는 조지훈의 산문, <삼도주>와 <멋설>이 게시판의 형태로 읽기 좋게 게시되어 있었다. 대학시절 즐겨 읽던 조지훈의 글들이 떠 올랐다.  현판은 그의 아내 연담 김난희 여사가 직접 쓴 글씨라고 한다. 문학관에 들어서니 지훈의 대표적인 시 <승무>가 계속 스피커를 통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이곳에는 조지훈 선생의 삶과 그 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지훈의 소년시절 자료들, 광복과 청록집 관련 자료들, 격정의 현대사 속에 남긴 여운, 지훈의 가족 이야기, 지사로서의 지훈 선생의 삶, 지훈의 시와 산문, 학문 연구의 핵심 내용, 조지훈 선생의 선비로서의 삶의 모습,  그의 아내 김난희 여사의 글씨와 그림 등을 살펴볼 수 있었다.

 

  

 전시물 중에는 지훈 선생이 쓴 주례사와 여러 곳에서 받은 감사장, 위촉장, 표창장 등의 자료를 비롯하여 평소 쓰던 문갑과 서랍도 있었다. 또한 평소 착용하였거나 소장했던 모자, 장갑, 부채, 담배 파이프, 안경, 외투, 삼베 바지 등도 연령별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는 그의 삶의 단상을 보여주는 1백 개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고, 헤드폰을 통해 그의 육성 시를 감상하게도 해 두었다. 이런 유물이나 전시장을 통해 우리는 떠난 사람의 자취를 더듬을 수 있고, 다시 한 번 그를 느끼고 추모할 수 있는 것이다. 준비해 간 캠코더로 동영상 촬영을 해 보기도 하면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다가 문학관을 나와 지훈시광장을 지나 월록서당으로 향했다. 지훈시광장에서는 2007년부터 매년 5월 17일을 전후하여 조지훈 시인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문학예술제를 개최한다는 기록이 있었다. 축제 내용은 문학세미나, 시와 음악의 만남, 백일장과 사생대회, 지훈시화전, 문학 퀴즈, 지훈시 암송 대회 등과 야생화 전시회, 한지 공예 작품전, 솟대와 토우 제작 등의 전통문화 체험 등이라고 하는데, 꼭 참석해 보고 싶은 뜻깊은 축제로 여겨졌다.

   월록서당도 문필봉의 정기가 감도는 곳으로, 지훈이 어린 시절 한문을 수학한 서당이다. 시도유형문화재 제172호인 이곳은 기록에 의하면 월하 조운도(1718∼1796) 선생이 의견을 내고 한양 조씨·야성 정씨·함양 오씨가 주축이 되어 조선 영조 49년(1773)에 지었다고 한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를 가진 한 일자형 건물로 전망이 좋고 한적하여 공부하기 좋은 곳으로 보였다. 가운데 2칸은 마루를 만들어 대청으로 꾸몄고 양쪽은 방을 만들어 놓았는데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잘 간직한 건물이다. 현판 글씨가 마음에 들어 알아 보니,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蔡濟恭) 선생의 친필이었다. 이 서당에서 공부한 이들 가운데 많은 석학과 명현들이 배출되었다는 것은 결코 그저 지나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이 마을에 머무는 동안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지훈의 문학관에도 이에 대한 글이 보였다. 조용헌의 글에 의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 Oblige)'는 '혜택 받은 자들의 책임' 또는 '특권 계층의 솔선수범'이라고 한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몇 번이고 강조한 것도 이 부분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경주 최부자집 이야기가 대표적인 사례가 되겠다. 그리고 이 주실 마을 호은 종택에 400년 가까이 내려오는 삼불차  정신은 바로 조지훈의 삶과 사상에도 영향을 미처 그의 '지조론'이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조(志操)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조지훈의 '지조론'에서>

   이처럼 선비로서의 대쪽같은 지조가 살아있는 마을에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떠 올리며, 오늘날 우리 지도층의 책임감과 도덕성을 저울질해 보았다. 그러면서 그들에 비해 비록 보잘것없는 내 삶이라 할지라도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 방향이 확실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월록서당을 나와 마을 입구에 있는 보호숲인 '시인의 숲'이라고 명명한 곳으로 걸어갔다. 흰 구름이 푸른 하늘에 맑게 떠도는 가운데, 주실(주곡)마을의 정경은 한층 한가로워 보였다.  마을 입구의 다리를 건너니 영양에서 봉화로 가는 길가에 아름드리 나무들이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외부에서 보면 숲에 가려 마을이 보이지 않아 마을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수령 100년의 소나무와 250년이 되었다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느릅나무가 풍성한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2008년에는 이곳이 생명의 숲과 산림청이 뽑은 '올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를 찾은 가장 큰 이유는 이곳에 조동진과 조지훈의 시비(詩碑)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찾은 것이 조지훈(본명 조동탁)의 형님인 조동진의 시비였다. <국화>라는 작품이 한글 고체와 한자 예서체로 쓰여 단아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슬픔의 정서로 가득 차 있었다.

     

      담밑에 쓸쓸히 핀 누런 국화야
      네 그 고독의 자태가 아프다.


      바람에 불려 불려 섧게 울어도
      기다리는 나비는 그림자도 없고


      서릿발 차운 손길에
      마당가 오동잎새가 한 개 두 개


      길게 살아 무엇하리
      오래 살아 무엇하리

      끝내 구슬픈 삶일 양이면


      오! 국화 외로운 내 마음아
      처량한 바람 소리에 가슴이 째진다. <조동진의 시 '국화' 전문>

 

   시비 뒷면에는 세림 조동진 시인이 21세에 요절하였다는 내용과 1940년에 조지훈이 형님을 위하여 추모의 글을 썼다는 것과,  아우 지훈 시인과 고우(古友)들의 애틋한 뜻을 받들어 누이 동생 동민 여사와 장질 광열군의 정성에 의하여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서기 2000년에 이 비를 세운다고 적혀 있었다. 글씨는 덕봉 정수암 선생이 썼다고 되어 있었다. 이 비문을 읽다가, 옛날부터 조지훈의 시 <완화삼>에 나오는 '차운산'이 그 어디인가가 궁금하였는데, 바로 여기, 지훈의 고향 마을 산이라는 것이 짐작되었다. 

 

  조동진의 시비에서 도로를 가로 지르니, 사진을 통해 익히 보던 조지훈의 시비, <빛을 찾아 가는 길>이 서 있었다. 반가움에 비석을 어루만지며, 따라 오지 않은 아내를 기다릴 수 없어서, 셀프타이머를 사용하여 기념 촬영도 해 보면서, 수업 시간에 몇 번이나 다룬 적이 있었던 이 시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았다. 

       

   사슴이랑 이리함께 산길을 가며

   바위 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살아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오누나.

 

   해바라기 닮아가는 내 눈동자는

   紫雲 피어나는 靑銅의 香爐

 

   東海 동녘 바다에 해 떠 오는 아침에

   북바치는 서름을 하소하리라.

 

   돌뿌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은

 

   푸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춤과 노래도 가꾸어 보자

 

   빛을 찾아 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 가는 바람이 되라. <조지훈의 시 '빛을 찾아 가는 길' 전문, 비문대로 표기>
 

   조지훈이 추구한 '빛'을 나는 무엇으로 찾아가야 하는가를 화두로 삼으면서, 나 또한 슬픈 구름 걷어 가는 바람이라도 된다면 하는 염원을 품어 보는 사이에 아내가 차를 몰고 왔기에 다음 목적지인 두들마을로 향했다. 허공에는 바람이 일고 하늘에는 지훈의 희망처럼 먹구름은 모두 사라지고 환하고 밝은 빛이 가득했다.  

  내가 이 두들마을을 찾고 싶은 이유는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문열의 고향마을이며, 전통 문화 마을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영양군의 홍보지에는 이 마을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석보면 원리리(두들마을)는 조선시대 대 광제원이 있었던 곳으로 석계 이시명 선생과 그의 후손 제령이씨들의 집성촌으로 석계고택, 석천고택, 석천서당 등 전통가옥 30여 채와 동대, 서대, 낙기대, 세심대라 새겨진 기암괴석을 비롯, 궁중요리서를 쓴 정부인 안동장씨의 유적비 등이 잘 보존되어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한국문학의 거장 이문열 작가의 고향으로서 그의 저서 '그해 겨울',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금시조', '황제를 위하여', '영웅시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많은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의 역정이 펼쳐지던 무대가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라고.

   뙤약볕이건만 높은 언덕마을이라 그런지 불어오는 바람에 시원함을 느끼며. 전통한옥체험관부터 찾았다. 한옥의 멋을 다시 한 번 실감하며, 우리나라도 아파트 대신 한옥이 몇 가지 형태로 표준화 되어 생활한옥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었다.

   다음으로 주곡고택을 거쳐 '광산문우(匡山文宇)'라는 현판이 걸린, '광산문학연구소'에 들렸다. 당호는 고향 뒷산의 이름을 빌려 왔다고 한다. 대지 750평, 건평 120평의 웅장한 전통 목조 한옥이다.  이곳은 한국 현대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문학도를 양성하기 위하여 마련된 문학연구소이다. 그리고 작가 이문열의 집필실이자, 세미나와 다양한 문학 행사가 열리는 문화공간이다. 무엇보다도 전통의 멋과 함께 문향(文香)이 은은히 감도는 느낌이 좋았다.  이곳저곳을 한바퀴 둘러 본 뒤, '자은헌(紫隱軒)'이라고 쓰인 정자에 올랐다. 선풍기가 필요 없는 바람에 취해 무심히 앉았다가 천지기운을 모아 발공을 해 보니  기운풀이가 잘 되었다. 마치 신선이 된 양했다. 이문열의 지기(知己)인 풍수연구가 최창조씨가 터를 잡아 주었다는 말이 실감났다. 시흥(詩興)을 이기지 못하는 중에 퇴계 선생의 시조를 한 수 창으로 뽑아 보며, 유익한 재충전의 시간을 보내었다. 매미 소리마저 얼마나 정겹던지 올 여름은 그렇게 바람과 구름과 매미 소리와 더불어 흘러가고 있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이 두들마을이 자랑하는  정부인 장씨 예절관과 유물전시관이었다. 예절관은 문이 잠겨 있어서 입장하지 못하고 곧장 유물관으로 들어갔다. 관람객이 둘밖에 없었는데, 에어컨이 시원하게 가동되고 있어서 미안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서 황송한 마음으로 잘보고 가야지 하고 열심히 눈으로 보고 사진으로 담았다.

   안동장씨에 대해서는 공부하고 가지 않았는데, 유물관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니, 정부인 장씨(貞夫人 張氏 : 1598∼1680)는 다음과 같다. 선조 31년 경북 안동 금계리(金溪里)에서 태어나서 숙종 6년 83세를 일기로 경북 영양 석보촌(石保村)에서 타계하였다. 만년에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이 대학자이자 국가적 지도자에게만 부여하는 산림(山林)으로 불림을 받아서 이조판서를 지냈으므로, 법전에 따라 정부인의 품계가 내려졌다. 이 때부터 '정부인 장씨'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음식 디미방의 저자 정부인 장씨! 어머니이자 며느리요, 아내로서 모범이 된 장씨 부인의 행적을 살펴보면서, 모르던 사실을 아는 즐거움을 통해, 여행의 효용성을 새삼 느껴 보았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그저 그렇게 살다가 소리 없이 가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요, 삶이겠지만, 자기의 사명을 자각하고 널리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을 하고 간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두들에 와서 새로이 알게 된 시인이 바로 이병각이다. 자료를 찾아 보니 이병각(李秉珏·1910~1941) 은 반제(反帝)와 순수(純粹)의 길목을 지키다 요절한  시인으로 영양의 이곳 두들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1929년 상경해 중동학교에 입학했으나 광주학생 사건의 여파로 퇴학당해 옥고를 치렀으며, 그후 도쿄 유학시절에도 반체제운동에 가담했다. 1935년 조선중앙일보에 '눈물의 열차’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하며 기자로도 활동했다. 이육사·신석초·오장환·김동리 등 문인과 가까이 지냈으며, 1941년 31세로 요절하기 전까지 시와 소설·평론·수필 등 50여 편을 남겼다. 시인이 생전에 남긴 작품들은 2005년 2월 '이병각 문학전집’(편저자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으로 발간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시비를 통해 만나게 된 <가을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뉘우침이여

   베개를 적신다

 

   달이 밝다

 

   베짱이 울음에 맞추어

   가을밤이 발버둥친다

 

   새로워질 수 없는 내력이거든

   나달아 빨리 늙어라. <이병각의 시 '가을 밤' 전문>

 

   베짱이 우는, 달 밝은 가을 밤을 지새우면서 새로움을 위해 뉘우치고 고뇌한 시인의 슬픔이 가슴 저리게 와 닿는다. 이 시인이 염원한 새로움이 그 무엇이었기에 그토록 베개를 적시며, 차라리 빨리 늙기를 바랐더란 말인가. 앞서 간 자들의 이러한 정신이 있었기에 광복을 맞은 우리 후세들은, 이육사의 <광야>에 나오는 '초인'처럼 이 땅에서 마음껏 자유를 외칠 수 있지 않나 하는 고마운 생각이었다. 두들마을을 떠나 '만지송'이란 천연기념물을 찾아 먼 발치에서 사진으로 담아 본 뒤, 곧장 집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번 여름의 뜨거움은 영양에서 고추의 매운 맛으로 대신한 느낌이었다. 조지훈의 '빛을 찾아 가는 길' 하나만 되새겨 보는 것만으로도 유익함이 넘쳐 난다고 하겠다. 일월산에 가보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언젠가 산행할 것을 생각하니 그 기다림이 은근히 즐거워진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 몇몇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중에, "피서를 어디 다녀왔는냐?"라고 묻기에, 영양을 다녀왔다고 하니, "영양이 뭐가 볼 것이 있느냐?"라고 반문했다.

   그래도 아는 이는 알리라. 영양에서 오일도와 조지훈을 만나고, 주실마을에서 '삼불차'의 교훈을 되새기고, 두들마을에서 이문열과 이병각과 정부인 장씨를 만나는 것도 의미 있는 일 중의 하나라는 것을.  바람과 구름과 온갖 소리들을 통해 대자연과 소통하며, 전통 한옥을 통해 옛사람들과 소통하며, 선각자나 문인들이 일깨워 준 올곧은 정신을 조금이나마 체득하는 것으로 인해 내 삶이 더욱 풍요로워진다면 가치 있는 삶을 위한 정진이라고.

   천지의 대자연 속에 진정 인간답게 사는 길이 그 무엇이고, 영원한 대자유의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 끝없이 열리고 이어진 길을 걸으며, 또한 진리의 길을 나름대로 체득한 자들이 남긴 작품을 통해, 우리 또한 무명을 사르고 빛을 찾아 간다면, 가고 가는 가운데 그 길을 알게 되고, 행하고 행하는 가운데 그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리라. 그리하여 진리가 우리의 삶을, 나아가 이 세상을 풍요롭고 이롭게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름대로 보고 느끼고 즐거워하면서, 조지훈의 빛을 찾아 떠난 영양에 대한 문학여행 답사기를 이만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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