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오월 / 노천명
청자(靑瓷)빛 하늘이
육모정[六角亭]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잎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正午)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 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딴 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 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 순이 뻗어 나오던 길섶
어디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호납나물, 젓가락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시집 <산호림>, 1938)
이 시는 청명한 오월에 느끼는 서정을 노래하고 있는 9연의 자유시로서 노천명다운 호사스런 시심이 잘 나타나 있다. 시인은 1연의 ‘청자빛 하늘’, ‘육모정 탑’, ‘연못 창포’, 6연의 ‘청머루 순’, ‘꿩’, ‘활나물’을 비롯한 여러 나물, 8연의 ‘보리밭’, ‘종달새’ 등의 시어로 우리 고유 정서를 드러내는 한편, ‘라일락 숲’, ‘여왕’, ‘여신’과 같은 시어를 통해 서구적 정감을 가미시키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계절의 여왕’인 오월에서 환희와 즐거움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더욱 아름다워지는 계절의 흐름 속에서 점점 초라해지는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옛날에 대한 향수와 비애를 함께 노래하고 있다.
1연에서는 오월의 정경을 ‘청자빛 하늘’, ‘연못 창포잎’ 등 청색의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으며, 2연에서는 화자가 오월의 푸르름 속에서 느끼는 고독을 보여 주고 있다. ‘젊은 꿈은 나비처럼 앉는 정오’이지만, 화자는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다고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3연에서는 옛 시절에 대한 향수의 감정을 제시하고, 4연에서는 산책을 하며 회상에 젖는 화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봄날의 아름다움 속에서 느끼는 화자의 외로움은 다소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들도 흔히 경험하게 되는 감정이다. 5,6연에서는 향수와 동경의 대상이 된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 그 지난날은 5연에서는 ‘풀 냄새’라는 후각적 이미지로 나타나 있으며, 6연에서는 ‘청머루 순이 뻗어 나오던 길섶’의 시각적 이미지와 ‘꿩’의 울음 소리인 청각적 이미지의 조화로 나타나 있다. 7연에서는 다시 현재로 돌아와 느끼는 화자의 심정이 제시되고 있다. ‘노래’를 부르자고 하는 것은 화자가 자신의 비애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볼 수 있으며, 8,9연에서 화자는 옛날에 대한 향수를 떨쳐 버리고, 오월의 하늘로 힘차게 비상하는 환희가 그려지고 있다. 이렇듯 이 시는 환희에서 출발한 감정이 옛날에 대한 향수와 비애로 바뀌었다가 다시 환희로 돌아옴으로써, 시인의 감정은 더욱 호사스러워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양승준, 양승국의 [한국현대시 400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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